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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 제도의 일본계앱에서 작성

캡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11.05 12: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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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 제도의 일본인​

마샬 제도는 1880년대에 독일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전하면서 마샬 제도도 일본의 식민지로 전환된다. 

식민지 기간 동안 많은 일본인이 태평양 지역으로 유입되었고, 이러한 일본인 정착민은 주로 사이판, 코로르(팔라우), 콜로니아(폰페이)에 정착했고 마샬은 얍과 더불어 일본인이 가장 적게 정착한 지역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이주민이 많았을 때는 1천 명이 넘는 일본인이 마샬에 정착했다. 

이 마샬의 일본인 이주인들은 대체로 사업가나 정부 공무원 출신으로 마샬에 정착하여 현지 추장 혈통의 마샬 원주민 여성들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다. 이렇게 탄생한 일본계는 오늘날 마샬 인구의 약 10%를 차지한다고 추측된다.

이러한 일본계 2세들은 비록 일본인에게 차별은 받을 지언정 법적으로는 일본인의 취급을 받고 일본인과 같은 학교를 다니고, 일본어를 모어로 배우며 다른 마샬인과는 구분되는 정체성을 키우게 된다. + 

그 결과, 현재 생존하고 있는 일본계 마샬인 2세들에 의하면, 스스로도 스스로를 일본인으로 자각하는 의식을 갖고, 다른 마샬인과는 다른 특별한 정체성을 느끼는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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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배경을 가진, 일본계 팔라우인의 경우도, 다른 팔라우인보다 '일본인' 정체성을 더 크게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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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퇴장 후

그러나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하고, 전후 미국은 태평양 제도에 존재하는 모든 일본인에 대해 거의 예외없는 강제 귀국을 실시했다.

그 과정에서 이 일본계 마샬인들의 일본인 아버지는 일본으로 강제 송환되고, 일본계 마샬인들은 아버지 없이 마샬 제도에 남게 된다. 하지만 마샬 제도는 전통적으로 모계 사회였기에 이들은 마샬 제도에서 '마샬인'으로 인정받아  큰 차별 없이 마샬 제도에서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오히려 이들은 전전에 받은 교육을 살려 미국 신탁통치 영하에서도 다른 마샬인보다 더 적극적으로 미국에 유학해 정치·경제의 중심이 되어 마샬제도 공화국 건국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계 혼혈들은 대부분 정치인, 사업가로 성장하여 마셜 제도의 신흥 엘리트 그룹을 형성하여 마셜 제도 초기 국가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의 활동을 돕다

한편 1969년부터 마샬 제도에서 태평양 전쟁 중 사망한 일본군의 유골 수집이 시작되었다. 이 때 유골 수집 활동을 주도한 것은 일본인 전쟁 생존자나 전몰자 유족이 결성한 유족회이다. 이들은 유골 수집 활동을 명목으로 매년 마샬 제도를 방문하였고, 그 외에 현지사회의 교육•보건•위생 부문에서의 개발 지원도 실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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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 제도에서 이루어지는 유골 수집]


동시에 마샬 제도 현지에서 일본인의 유골 수집 활동을 적극 지원한 것이 일본계 마샬인 사회이다. 마셜에서 국외로 유골을 보내기 위해서는 마셜 역사보호국에서 정한 규정에 근거하여 번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제한된 시간 동안 이런 번잡한 과정을 진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단기간의 유골수집사업을 현지에서 지원해주었는데 그 중심에 있던 것이 일본계 마샬인 사회이다.

일본계 마샬인 사회는 1960년대에 이미 마샬 사회에 거의 완전히 동화되었으나 유골 수집을 위해 방문한 일본인 위령단과의 교류 속에서 일본인을 뿌리로 하는 자신들의 혈통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1979년, 일본계 마샬인 2세를 중심으로 하여 위령단의 지원, 일본과의 교류 촉진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계마샬인회'가 창설되었다. 이 단체는 1999년 마샬 제도 정부로부터 국내의 비정부조직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규 2008년에는 마주로 환초에서 마주로의 일본인을 위한 커뮤니티 센터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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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계마샬인회는 일본 유족회에 유골에 관한 마샬 국내 정보를 정기적으로 보고해주고 있다. 또 유골 수집 단체가 유골 수집에 내도했을 때 수집단체 대신 마샬 각지에 산재한 전통 추장들에게 일본인 유골의 인도를 인정해주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자처하고, 허가장에 서명 등 여러 절차를 진행해 위령단의 단기 활동이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족회는 일본 정부에도 위령단 파견을 요청하고, 실제로 현지에서 유골 수집 활동이나 위령식을 실시함과 동시에 현지의 학교 건설 등 사회개발의 협력을 진행한다. 한편 일본계마샬인회는 위령단의 활동이 원할히 진행될 수 있도록 유골에 관한 정보 수집을 진행하고 유골 반출에 관한 여러 절차를 대행했다. 그 밖에도 일본인 묘지를 청소해주고 유족회의 환대를 준비하였으며 또 마주로 환초 중앙에 일본 정부가 건립한 [동태평양 전몰자비]에서 위령단에 의해 시행되는 위령식에 필요한 준비도 대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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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로의 동태평양 전몰자비]

의미

이 기념비는 일본군 전사자들을 추모하고 동시에 일본과 마샬 제도의 우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의도로 건립되었다. 

"평화기념공원에 전몰자비는 전쟁을 막기 위해 일본 정부에서 세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일본인들과 함께 추모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애도해야 하는 것은 어린 아이도 아는 상식이죠. 하지만 젊은 미국인들은 어떻습니까? 미국인은 스포츠와 바베큐 파티를 즐기러 공원에 오죠? 어떤 사람들은 전몰자비에 공을 차기도 합니다. 마샬의 젊은이들이 미국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게 안타깝습니다. 마샬 청년들은 이제 미국 청년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 일본계 마샬인은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기념비 앞에서 스포츠를 즐기는 미국인과 마샬 청년들의 퇴폐적인 모습을 비판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 전몰자비에 대한 설명을 요청하는 일본인 연구자에 대해 많은 일본계 마샬인들은 전몰자비에 대한 설명에서 그치지 않고, 오늘날 미국을 체계적으로 비판하는 것, 혹은 과거 일본 시대 마주로의 번영을 칭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전몰자비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러한 기념비 의미의 왜곡은 전후 미국에 대한 마샬인의 불만과 관련이 깊다. 전후 마샬 제도는 미국의 신탁통치령이자 군사적 요충지였고 미국은 지역에 대한 경제개발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고, 최소한의 식량 지원만 이루어졌다.(이것은 동물원 정책이라고 불린다.) 특히 마샬 제도에서 이루어진 핵실험은 지역에 영구적인 피해를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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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복 비키니의 유래가 된 비키니섬 핵실험]


일본계 마샬인은 미국이 전통적인 마샬릐 문화를 파괴했다고 불평해왔다. 1960년대 미국 정부는 현지 주민들의 반미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현지 주민들의 참여를 늘리고 미국과의 우호 증진 정책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다. 1965년부터 지원 예산은 15년 동안 4배로 늘어났다. 또한 지방행정기능 강화를 위해 행정직원, 의사, 자원봉사자 등을 파견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미크로네시아 전역에 걸쳐 평화봉사단으로 불리는 자원봉사자 1,500명이 파견됐다. 

그러나 물질문화와 미국적 가치관은 마샬의 전통적인 문화와 가치관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냉동식품과 통조림 식품의 유입으로 식생활이 변화되어 비만과 생활습관병이 발생하고 있다. 서구의 교육과 도덕은 평화봉사단의 청년들에 의해 전수되었고, 이는 지역 청년들의 전통적 가치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다. 그 결과, 노인 및 추장에 대한 존중과 같은 지역사회의 전통적 가치가 붕괴되었고, 청소년들은 종종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하는 퇴폐적인 생활 방식으로 이어졌다.

또한, 마주로 환초 도시지역의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도시화와 관련된 토지계약 문제 등의 소송이 빈번히 발생하게 됐다. 토지소유권과 문서교환을 둘러싸고 친족간 다툼이 잦아지자 마샬인 노인들은 이런 사회 풍조를 미국이 가져온 '나쁜 문화'라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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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 수집의 의미

일본계 마샬인들이 유골 수집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긴 했으나, 사실 마샬 사회의 전통과 관습, 전승 등을 살펴보면 '마샬인'이 유골'을 특별시하는 부분은 찾을 수 없다.(마샬 제도의 풍습은 애초에 시체를 바다에 버린다.)

그 탓에 젊은 마샬인들 대부분은 위령단과 일본계 마샬인이 진행한 유골 수집 활동을 기이한 것으로 인식하고, 흙 속에 묻힌 유골을 일부러 꺼내 화장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계 마샬인들에게 있어 유골 수집의 활동은, 스스로에게 내재된 일본 혈통과 정체성의 재인식과 미국에 대한 비판이라는 일종의 심볼로 기능하고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아버지인 일본인들은 강제 귀국당했지만, 일본계 2세들은 그대로 마샬에 남아 있었다. 마샬 사회는 전통적으로 모계 사회여서, 남은 혼혈아들이 특별히 차별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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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전전에 받은 교육을 살려 미국 신탁통치 하에서도 적극적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마샬 정치•경제의 중심이 되고[1970년대 마샬의 민간 기업 사업가는 거의 전부 일본계였다], 마샬 제도 공화국 건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그들에게 전후 일본은 자신들의 뿌리가 있는 장소이면서,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이 불가능한 먼 존재가 되었다. 마샬에서 전후 일본에 대한 정보는 너무나도 부족했다. 또 같은 마샬인들 중에서는 전전 일본 지배 중 벌어진 학살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항의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많은 일본계 마샬인들은 전후 마샬 제도를 통치한 미국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일본계에게 있어 일본군에게서 마샬을 해방했다고 하며, 마샬에 주둔한 미군이란 비키니 환초에서의 핵실험과 쿼젤린 미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또 자유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반입된 가치관이나 자유연합협정에서 근거한 원조 경제의 결과는 전통이 계승되지 않고 오히려 연장자에 대한 경의의 생각이나 농업이나 어업을 하는 데 있어서의 협동의 중요성이라는 마샬 사회의 전통의 가치관을 상실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계 마샬인 대부분은, 젊은 마샬인들이 미국인의 가치관에 빠져 간다는, 젊은 마샬인들에 대한 불만과 혐오감을 공개적으로 나타내 왔다. 연구자들은 현지 조사로부터 일본계 마샬인 2세로부터 다음과 같은 증언들을 얻어 냈다.

"탈로이모 재배는 다른 재배보다 중노동이다. 그래서 일본 시대에는 젊은이들이 kumit을 만들어 협력해서 일하는 법을 배웠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협력해서 일하는 것보다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끔찍한 일이다."

미국의 지배에 대한 반감으로 자치 정부의 중추를 차지하며 건국을 완수해 온 일본계 마샬인들은 점점 전전의 일본 통치에 대해 동경의 염을 갖게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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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의 일본이란 구체적인 이미지라기보다도 막연한 추상적이고 회고적인 이미지로서 구축된 것이다. 일본인이 마샬 제도에서 추방된 이후 1990년대 이전까지 마샬 제도에 일본인은 거의 오지 않았다. (올 수 없었다.) 이러한 '공백기'로 일본계 마샬인에게 일본은 단지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만으로 기억이 보존되었다.

예를 들어 전전의 엄격한 교육 제도(피가 날 때까지 학생을 체벌하던)조차 지식을 익히는 데 있어서 중요한 수단이었다며 긍정하고 있다. 심지어 교육 칙어에 관해서도 "인간으로의 길을 걷게 한 도덕관"이라며 자랑스러워 하는 이들도 있다.

정작 전후 일본 내에서의 급격한 가치관 변화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다. 그 결과 일본에 대해서는, 전전의 좋은 이미지만 선행하는 스스로에게 있는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공허한 기지로 비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가운데서 일본계 마샬인들이 전후 일본과의 관계를 재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 위령단의 방문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위령단으로 온 사람들은, 당연히 일본계 마샬인과 직접적인 혈연 관계가 없다. 단지 잊어 온 일본어로 대화함으로, 생존자와 유족들이 말하는 마샬의 일본 시대 추억을 공유하는 것을 통해, 이전까지 무지했던 시체의 뼈가 동포의 유골이라는 걸 인식하고 관리함을 통해 자신들의 일본 혈통을 재인식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일본계 마샬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복잡한 과거를 무시하거나 탈맥락화해 왔다. 그들의 과거 회상은 미국에 대한 반발감과 일본 시대에 대한 향수로 인해 역사적 복잡성이 무효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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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 제도 현 대통령인 데이비드 카부아. 그의 외할아버지가 일본인이었다.]
오늘날의 일본계 마샬인

마샬의 일본인 이주자가 적었던 점도 있지만, 일본 시대에도 마샬의 일본 문화는 어디까지나 교육이나 새로운 기술을 마샬인에게 전하는 정도에 그치고, 마샬 제도의 전통 문화가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일본계 마샬인들은 전후 미국 신탁통치 하에서도 일본 시대에 받은 일본 교육과 경제적인 이득을 바탕으로 마샬 사회에서 정치가, 관료로 활약하며 마샬 제도의 신흥 엘리트 그룹을 형성해갔다.

하지만 일본계 마샬인을 둘러싼 환경은 점점 악화됐다. 마샬의 젊은 세대는 일본계 마샬인들이 혐오감을 표한 미국의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을 완전히 받아들였고 더 이상 마샬의 전통을 계승하지 않고 있다.

거기에 오늘날 일본계 2세들은 거의 모두 죽거나 아주 늙어서 이제 마샬에는 일본어가 가능한 사람도 거의 없다. 일본계 3세부터는 일본어를 전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으며, 스스로 일본계임을 자각하는 정체성을 느끼는 경우조차 거의 없다. 이제 마샬 제도에는 일본의 존재감보다는 대만이나 중국의 존재감이 더 드러나고 있다. 
출처

太平洋島嶼国における国民国家の形成とエリートの変容 -マーシャル諸島共和国の現代政治についての動態的民族誌- , 黒崎 岳大

Two monuments in Majuro Atoll and economic development: a case study of the East Pacific monument to the war dead and the Seion-Kinenhi, TAKEHIRO KUROS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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