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로 촉발된 ‘노재팬(No Japan·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이 2년 넘게 이어지면서 한국에서 철수하고 있는 일본 기업이 줄을 잇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 대표 브랜드로 꼽히는 유니클로의 국내 철수설까지 나돌고 있다. 벼랑 끝에 몰린 일본 기업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노재팬(일본산 제품 불매운동) 문구. /온라인 커뮤니티
◇유니클로, 잇따른 폐점 이어지자 철수설도
2019년 7월 시작된 노재팬 운동은 당시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와 경제보복 조치에 반발한 국내 소비자의 자발적인 움직임으로 시작됐다. 노재팬 운동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기업이 유니클로다. 유니클로는 일본 본사 임원이 “한국의 불매운동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사실이 알려져 불매운동의 표적이 됐다.
유니클로는 롯데쇼핑과 일본 패스트리테일링그룹이 설립한 에프알엘코리아가 운영한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액은 5746억원으로 전년 대비 41% 하락했다. 영업손실액도 129억원에 이른다. 에프알엘코리아는 2018년만 해도 1조4188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국내 패션업계에서는 단일 브랜드를 가진 패션회사가 연 매출 1조원을 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치열한 경쟁과 유행에 민감한 패션 시장의 특성상 단일 브랜드로 1조원대 매출을 달성하기 쉽지 않아서다. 연매출 3000억원이면 상당히 인기도 많고 인지도 높은 브랜드로 간주되며 7000억원이면 초대형 브랜드로 평가받는다.
노재팬 운동으로 가장 타격을 입은 일본 기업으로 꼽히는 유니클로는 잇따른 점포 폐점, 구조조정 등으로 국내 철수설이 끊이지 않는다. /조선DB
2019년 8월말 190개였던 유니클로 매장 수는 2021년 9월말 기준 135개로 급감했다. 2019년 8월 종로점, 2020년 8월 강남점, 올해 1월 명동점, 3월 홍대점 등 서울 주요 상권에 있는 대형 거점 매장이 문을 닫았다. 명동점의 경우 2011년 개장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유니클로 매장으로 개장 당일에만 매출 20억원을 기록했고 질 샌더 디자이너 협업 컬렉션 등이 출시될 때마다 수백 명이 줄을 섰던 매장이다. 10월 24일에는 국내 첫 매장인 잠실점도 영업을 종료한다.
유니클로의 자매 브랜드 GU(지유)는 작년 8월 국내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온라인 판매만 남겨뒀다. 지유는 2018년 9월 한국에 첫 매장을 냈는데 흉흉한 민심에 2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한국 영업을 접기로 결정했다.
대규모 적자를 딛고 유니클로는 힘겨운 구조조정 끝에 작년 말부터 흑자로 돌아섰다. 지난 1월 유니클로의 모기업 패스트리테일링은 1분기(2020년 9월~2020년 11월)에 한국 유니클로가 흑자전환했다고 밝혔다. 한국을 포함한 유니클로 해외사업부는 지난해 9~11월 매출액이 2606억엔으로 전년 동기 대비 7.2% 감소했지만 영업이익은 414억엔으로 9.5% 증가했다고 밝혔다. 일본 유니클로 본사 측은 한국 법인의 흑자 전환에 대해 “실적이 안 좋은 매장을 폐점해 비용을 줄이고 재고 수준을 관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니클로의 흑자전환 소식에도 불구하고 유통업계에서는 유니클로가 한국 시장에서 발을 뺀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2022년 1월 철수설도 나오는 상황. 에프알엘코리아는 한국 사업 철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회사 관계자는 “계속된 매장정리가 소문을 키운 것 같다”고 분석했다.
◇DHC, 슈에무라…일본 브랜드 줄줄이 철수
유니클로의 국내 철수설이 끊이지 않는 건 잇따른 일본 기업 철수의 여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달 2일 DHC 코리아는 홈페이지에 올린 공지를 통해 영업 종료 소식을 알렸다. DHC 코리아는 “오랫동안 DHC 코리아를 사랑해주신 고객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며 “좋은 제품과 서비스로 고객 여러분들을 만족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아쉽게도 국내 영업 종료를 결정하게 됐다”고 했다. DHC 코리아 쇼핑몰은 9월 15일을 마지막으로 운영을 종료했다.
김희선을 모델로 내세워 한때 100억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던 DHC는 지난 9월15일 한국 시장에서 완전 철수했다. /DHC코리아
DHC는 클렌징 오일과 건강보조식품 등을 판매하는 일본 기업으로, 2002년 4월 한국에 진출했다. 배우 김희선, 정유미 등을 모델로 내세워 영향력을 키웠고 한 때 연 100억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지만 국내 진출 19년5개월 만에 한국 시장에서 완전 철수했다.
DHC는 잇따른 혐한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2019년 노재팬 운동이 시작되자 DHC 자회사인 ‘DHC 텔레비전’이 “한국은 원래 바로 뜨거워지고 바로 식는 나라”라는 혐한 발언이 담긴 ‘도라노몬 뉴스’를 내보내 문제가 됐다.
DHC의 자회사 ‘DHC텔레비전’에서 문제가 된 혐한 발언. /JTBC 뉴스 캡처
이후 공식 홈페이지에 야마다 아키라 대표이사 명의로 “한국 언론에서 우리 프로그램을 비난하지만 사실에 근거한 정당한 비평”이라고 밝히면서 논란은 이어졌다. 이에 대해 한국법인 김무전 DHC 코리아 대표는 “DHC텔레비전 출연진의 모든 발언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며 “물의를 일으킨 점은 깊이 사죄한다”고 밝혔으나 논란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DHC 코리아는 여전히 한국 영업을 이어갔지만 올리브영 등 주요 오프라인 채널에서 퇴출당하면서 실적이 급감했다. 온라인 판매만 유지하기에 역부족이었던 DHC코리아는 ‘굿바이 세일’을 끝으로 9월 15일 국내 영업을 종료했다.
DHC에 이어 슈에무라도 9월 30일 국내 시장에서 완전 철수했다. 2005년 한국에 진출한 지 16년 만이다. 슈에무라는 일본인 메이크업 아티스트 우에무라 슈가 1967년에 만든 브랜드로2004년 로레알에 인수됐다. 로레알그룹에 속해있지만 생산은 여전히 일본에서 이뤄지면서 노재팬운동의 대상이 됐다.
일본 화장품 브랜드 슈에무라도 9월 30일을 끝으로 한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슈에무라
불매 운동 이후 슈에무라는 백화점 매출이 매출이 15% 감소하는 등 사업에 타격을 입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슈에무라는 일본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있어 일본 불매 운동에 타격을 입었다”며 “판매 제품이 색조 중심이라 코로나19 이후 수요가 더 줄었다”고 말했다.
이미 일본 자동차 브랜드 닛산과 인피니티는 2020년 12월을 끝으로 국내 시장에서 철수했다. 사실 닛산과 인피니티는 불매운동 직전에도 판매량이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불매운동의 영향으로 더이상 국내에서 사업을 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해 철수한 것이다. 일본 닛산 자동차는 2019 회계연도 실적발표에서 6700억엔의 순손실에 따른 적자전환과 함께 “올해부로 한국시장에서 철수하겠다”고 밝혔다. 2004년 국내시장에 진출한 지 15년 만이다.
카메라 브랜드 올림푸스도 지난해 6월 한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올림푸스는 일본 시장에서 캐논, 소니, 니콘 등 대형 전자 브랜드와 비등한 수준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지만 한국 시장에서는 이들 기업에 밀려 입지가 좁은 상황이다. 국내 매출에서 디지털카메라 등 영상사업이 차지하는 비율도 6% 수준으로 낮다. 올림푸스는 지난해 2월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수익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불매운동과 코로나19의 악재에 결국 한국 진출 20년 만에 카메라 사업을 종료하기로 했다. 다만 올림푸스는 일본과 해외에서 카메라 사업을 이어갈 것으로 알려졌다.
◇게임, 담배 등 노재팬 무풍지대도
노재팬운동으로 국내에서 철수하는 기업이 줄잇고 있지만 모든 일본 기업이 한국에서 고전하는 건 아니다. 여전히 승승장구하는 브랜드도 많다. 닌텐도, 담배, 골프의류, 무인양품 등 대체품이 없거나 마니아층, 개인 기호와 직결된 브랜드가 대다수다.
지난해 3월 일본 대표 콘솔게임 전문업체 닌텐도가 선보인 ‘모여봐요 동물의 숲’은 출시 이후 품귀 현상을 빚었다. 출시 당일 매장 앞에는 긴 대기줄이 형성되며 대란이 일었고, 온라인 중고거래 사이트에선 두 배 가까운 가격에 거래되기도 했다. 하반기엔 ‘플레이스테이션5’를 구매하기 위해 게임기 매장 앞에 장사진을 쳤고 지금도 온라인에 재고가 채워질 때마다 순식간에 품절된다. 중고 시장에서는 판매가의 2배 넘는 가격에 플레이스테이션5가 거래되고 있다.
일본산 담배 또한 불매운동 무풍지대 중 하나다. 일본 담배는 불매운동 시작 이전보다 국내 판매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담배 시장 특성상 기호식품이라는 성격이 강해 소비자 충성도가 높기 때문이라는 업계 분석이다.
일본 골프용품도 마찬가지다. 업계에서는 노재팬 불매운동 영향이 일본 골프용품 수입에는 거의 없었다고 평가한다. 게다가 지난해 코로나19 특수를 누리면서 일본산 골프 브랜드는 호황기를 맞았다. 지난해 일본 골프용품 수입액은 2억4,835만달러(2,771억3,376만원)로 전년보다 14.6% 늘었다.
이는 불매운동이 장기화되면서 대체제가 없는 경우 원하는 소비를 포기하는데 한계를 느끼는 소비자가 늘어난 것으로 풀이된다.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거나 브랜드 선호도가 높아 일본 외 다른 대안적 선택지를 찾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 소비가 노출되는 상품은 적극적으로 불매를 하면서 혼자 즐기는 제품과 콘텐츠에는 팬들이 몰리기도 한다. 일본 기업이 줄줄이 철수하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국내에서 호황을 누리는 일본 기업도 있다는 얘기다.
글 시시비비 키코에루
시시비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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