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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테라 공성전 : 종말과 죽음 3부] 10:xv 등불

말카도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3.12 18: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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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xv 등불



찰나의 깜박임이 펼쳐진다.


작고도, 너무도 작다. 테라와 태양계를 집어삼킨 격노한 워프의 격류에 비기면 왜소하기까지 한 사이카닉 힘의 섬광이다. 들끓는 용암 위의 한 줄기 불꽃, 파도치는 바다의 물보라 속 한 방울, 유기체의 조직 전체에서 분자 하나와 다름없다. 아무것도 아니며, 중요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다.


그리고 짧다. 8초의 섬광이었고,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덧없고 무의미한 시간이다. 그 8초는 자하리엘 엘 주리아스가 ‘시작’이라는 단어를 외친 순간 시작해, 타이퍼스의 쉿쉿대는 대낫이 탄데리온을 쪼개고, 아스다라엘의 두 다리를 모두 베어내며, 자하리엘의 상체를 찢어발겨 쓰러뜨린 후, 세 사서의 사이킥 협응이 깨지면서 끝난다.


하지만 그 8초간 비친 순수한 사이킥 힘의 섬광이, 비물질계의 소용돌이에 작은 구멍을 불태워 뚫는다. 타이퍼스가 펼쳐낸 뼈의 노래가 가져온 카오스의 조화를 깨뜨린다.


8초의 찰나가 끝나고, 뼈의 노래가 다시 시작된다. 울부짖는 워프는 뚫려버린 구멍을 메운다.


하지만 그 8초의 찰나 동안, 뼈의 노래는 침묵한다.






자연 증폭실에서, 유프라티 킬러는 그 깜빡임을 느낀다. 주변의 기반암, 벽, 높은 천장, 심지어 그녀가 서 있는 대좌까지, 모두를 졸라매던 뼈의 노래가 순간 멈추며 모든 것이 부드러이 느껴진다. 더 이상 산은 조여들지 않는다. 그 산이 펼쳐진다. 경직된 근육이 풀리듯이, 혹은 다시 호흡하기 위해 목구멍이 열리듯이 펼쳐진다.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마술의 압박에서 풀려난 공간에 풀려나며 신음한다. 수많은 군중의 너덜거리는 옷과 더러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말려 흔들린다. 몇은 두려움에 울부짖지만, 대부분은 계속 킬러의 말을 합창하듯 이어간다. 말라붙은 입이 갈라지고, 목에서는 피맛이 날 지경이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저에게 말씀이 임했듯, 여러분께서도 말씀하십시오. 황제 폐하는 사셔야만 합니다.”


산이 숨을 내쉰다. 산이 헐떡이며, 막혔던 숨을 내쉰다. 산이 숨을 들이킨다.


산이 말한다. 산이 그들의 말을 토한다.


산이, 빛으로 말한다.


빛이 솟는다. 벽을 이룬 돌에서 빛이 솟는다. 처음에는 불꽃과 섬광의 깜빡이는 무늬로서, 그리고 네온처럼 벽의 흠집과 착색의 윤곽을 메우는 선으로, 그리고 모든 바위의 표면과 평면이 조명처럼 그 안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부드럽고 하얀 빛이, 쌓이고 쌓인다.


그리고 밝아지며, 더욱 밝아진다. 그림자가 사라진다. 윤곽선이 흐릿해진다. 너무 밝아서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어둠이, 지독한 빛 속에서 토막난 채 죽음을 맞는다.


킬러의 얼굴에 바람이 몰아친다. 빛이 그녀의 눈에 쏟아진다. 킬러는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것이 공포인지 경이인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지금 부유하고 있다. 다른 이들도 허공에 부유하기 시작한다. 울려 퍼지는 빛 속에서 공중에 매달린다. 몇 순례자는 들려 올라가며 몸을 흔든다. 마치 마른 종이나 하얀 꽃잎처럼, 재로 빚어진 인형처럼, 그들로부터 먼지가 흩날린다.


킬러는 산을 꿰뚫어 본다. 카르테우스도 마찬가지다. 눈 먼 지-멩조차 그러하다. 그들 모두가 그러하다. 수백만이 그러하다. 바위의 껍질을 뚫고, 과거와 미래의 자취를 덮은 반투명한 피막을 뚫고 본다. 사제를, 마술사를, 선견자를, 성스러운 바보들을, 광인을, 축복받은 자를, 다른 시대의 순례자들을, 진리를 찾는 자들을, 추방자들을, 수련자들을, 이 산에 왔던 모두를, 이 산에 이끌린 모두를, 살아 있는 바위의 통찰을 받아들일 상상력을 가졌던 모두를 본다. 몇 세대, 몇백 세대, 몇천 세대가 바위의 표면을 뚫고 바라본다. 그 너머에, 역사의 가장 먼 부분까지 뻗친 침묵하는 그림자들의 대열이 펼쳐진다. 채색된 무당들, 창과 제물, 염료가 든 병을 든, 호기심 많은 사냥꾼들이 보인다. 그 뒤로 다른 형상들이 비친다. 더 경계하면서도 매료되었고, 호기심과 두려움에 동시에 사로잡힌 존재들이다. 인간이 아니지만, 언젠가 인간이 될 형상들이다. 세기와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혈통이요, 유전자 코드가 뻗친 미래 속에 이어지는 유산들이다.


“저에게 말씀이 임했듯, 여러분께서도 말씀하십시오. 황제 폐하는 사셔야만 합니다.”


킬러는 빛 속에서 종잇장처럼 녹아내리며 떠오르는 웨레프트를 본다. 울부짖고 있다. 모두가 그러하다. 서서히 우아한 공포 속으로, 무시무시한 경이 속으로 그들이 승천한다. 그들은 불꽃이, 세포의 먼지가, 무시무시한 광채의 너울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죽지 않았다. 육채가 부재할 뿐, 이 빛 안에 그들 모두가 있다.


킬러는 리타 탕의 비명을 들으며 몸을 일으킨다. 눈을 크게 뜬 채, 불타오르며 리타가 킬러를 바라본다. 다음 순간, 그녀 역시 바람에 휘날리는 별들과 먼지로 화한다.






공백의 산이 떨고 있다. 충격 속에 산의 어깨가 흔들리고, 거기 쌓였던 수백만 톤의 눈이 울퉁불퉁한 측면 능선을 따라 쏟아진다. 하얀 안개처럼, 얼음 결정으로 빚어진 구름이 솟구친다. 우라늄 광석처럼 시커먼, 폭만 200킬로미터에 달하는 폭풍이 모든 것을 삼키며 능선을 따라 파문을 일으킨다. 칠흑 같은 구름이 접히고, 그 안에 거대한 후광이 뻗치고 있다. 진주빛의 벼락이 텅 빈 하늘을 갈갈이 찢으며 펼쳐진다.


산의 관문들을 따라 청백색 빛의 사나운 창이 눈과 얼음을 녹이고 그림자를 소멸시킨다. 데스 가드 군단이 부르던 뼈의 노래가 새로운 분노 속에 다시 울부짖지만, 그 적수가 되지 못한다. 가장 오래된 유기적 부패물, 고대의 절멸한 바이러스, 시원의 성간 박테리아 군락, 테라에서 죽음이 발생하기 전부터 존재한 부패의 원초적 정수에서 비롯한 사생누대의 역병이 검은 절벽에서, 전투 플랫폼에서 불타며 멸균과 정화에 휘말린다. 죽은 바이러스 물질이 끈적하고 검은 비가 되어 내린다. 죽어버린 벌레들의 껍질이 고름처럼 절벽에서 흘러내린다. 수천에 다하는 검은 형상들이 비명을 지르며 통로 위로 쓰러진다. 쏟아지는 빛의 쇄도에 휘말리고, 대륙을 쓸어버릴 눈과 얼음에 휩쓸린다. 몇몇은 그 자리에서 폭발해 버리고, 몇몇은 그대로 도망친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파괴가 포효하며 으르렁거린다.


그 노호 속에, 타이퍼스의 비명이 섞인다. 그의 노래는 찢기고 일그러져 소음 속에 삼켜진다.


산의 수호자들, 콜스웨인과 그 휘하의 다크 엔젤 군단병들, 그리고 지기스문트와 그 휘하의 입회인들은 적들과 함께 대재앙의 격변에 휩쓸린다. 수많은 이들이 제14군단의 전사들과 함께 순식간에 휩쓸린다. 미끄러지는 얼음 속에 으깨지고, 바람에 찢기고, 빛 속에 불타고, 성스러운 기름이나 더러운 석유처럼 쏟아지는 죽어버린 생체 물질의 물결에 휩쓸린다. 절벽이 무너져 떨어져 나가고, 바위가 쓰러지고, 산의 측면을 빛이 긁어내며 전투 플랫폼이 붕괴한다.


몇몇만이 겨우 버텨낼 뿐이다. 운이 좋았을 따름이기도 하고, 혹은 격렬한 분노 속에 그렇게 행한다. 금이 간 바위에, 혹은 뒤엉킨 잔해에, 혹은 그저 서로를 붙들고 버텨낸다. 피투성이가 된 손과 찢긴 손가락이 꽉 움켜쥔다. 그들의 뼈를 부수는 비명을 지르는 빛도, 갑주와 폐를 짓누르는 눈보라 같은 힘도 그 움켜쥠을 풀어내지 못한다.






한때 하스가르드 관문이 있던 곳, 슬픔을 불러오는 자 제폰은 잠시 자신의 세르펜타 피스톨 하나가 오발된 것이 아닌지 생각한다. 두 개의 볼카이트 무기가 모두 과열되어 폭발하려는 것은 아닌지 싶어 내던져 버릴 심산이 된다.


하지만, 둘 다 저 섬광의 근원이 아니다. 소용돌이치는 안개를 뚫고 오는 빛의 강도는 그의 눈을 거의 찌를 정도로 맹렬하다.


“파프니르!”


제폰이 소리친다. 란은 다시 쓰러진 채다. 몇 미터 떨어진, 피로 물든 참호의 벽에 거의 붙들린 꼴이다. 해치운 순간, 란의 위로 쓰러진 월드 이터 군단병의 시체로부터 도끼를 뽑아내고 벗어나기 위해 발버충치는 중이다. 제폰은 란에게 다가가 시체를 옆으로 밀쳐낸다.


제폰은 란을 똑바로 일으켜 세운다.


“보이시오?”


제폰이 소리친다. 입이 피로 흠뻑 젖어 있다.


란은 고개를 끄덕인다. 못 보기가 더 어렵다. 사방에 길어진 그림자가 딱딱하게 굳어진다. 학살이 시작된 순간부터 그들을 뒤덮던 섬뜩한 붉은 빛이 더욱 밝은 광휘 앞에 밀려 씻겨난다. 사방에서 몰려와 두 사람을 추격하던 반역자들조차, 멈춰선 채 그 빛을 바라본다.


흩날리는 연기와 몰아치는 재 사이로, 저 멀리, 아마도 한때 지평선이었을 곳에 빛의 기둥이 있다. 끝없는 황량함을 가로질러, 일출처럼 솟구친 빛이 어둠을 몰아낸다. 백열하는 거대한 섬광이 눈부시게 빛난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지워버릴 지경으로 빛이 뿜어진다. 무엇도 숨지 못한다. 유리에 비친 햇빛처럼 불길이 액화된 진흙 위로 반사된다. 세상에 펼쳐진 진정한 공포 위로 빛이 비친다. 갑주를 두른 시신이 뒤엉켜 쌓인 괴상한 깔개 위로, 시체들의 무더기 위로, 무너진 전투 기계들과 불타버린 전차의 차체들 위로, 절벽과 언덕 위에 마치 사막의 언덕이나 얼어붙은 바다의 파도처럼 가득한 망자들 위로 그 빛이 비친다.


“저게 뭐지?”


란이 중얼거린다.


제폰은 고개를 젓는다. 그가 제 형제를 끌어내려 한다. 갑작스러운 여명 앞에, 적들은 혼란에 빠진다. 그렇게 그 둘에게 빠져나가 전열을 재정비할 기회가 주어진다.


란은 저항한다. 저 빛은 어떤 의미도 없다. 무엇이 저 빛을 끌어냈는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기념비적인 폭발의 섬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란은 저기서 시선을 뗄 수 없다. 어떤 의미도 없음에도, 모든 의미를 담아 뻗친 칭이기에.


“그러니까…”


란이 입을 연다.


“어디지?”


다시, 치천사는 고개를 젓는다. 추측조차 무의미하다. 이 전쟁 속에, 어떤 방향도 살아남지 못했기에. 방향의 개념은, 방향을 느끼는 감각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그조차 망설인다. 파프니르 란이 그렇듯이, 그 역시 저 불꽃의 기둥이 품은 의미를 느낀다. 희망 너머, 마치 어떤 방향이 기적적으로 회복된 것처럼 느껴진다.


최소한, 한 방향이 느껴진다.


“북쪽.”


제폰이 입을 연다.


“저것이 북쪽이오.”


불기둥이 희미해진다. 다시 빛이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붉은 어둠이 다시 내려오기 시작한다.


“안돼!”


란이 비통하게 외친다.


다음 순간, 깜빡임이 닥친다. 그 빛이, 천 배가 되어 돌아온다.






“모두 조용히!”


산드린 이카로가 소리치고, 헤게몬 탑의 광대한 로툰다 전당이 침묵에 잠긴다. 일어선 이카로가 무언가를 바라본다. 모두가 제 좌석에서 일어선다. 시도지, 가스톤, 일리야 라발리온까지. 모두가 함께 바라본다. 


빛이다. 창문을 봉쇄하고 있는 로툰다 전당의 방폭창 너머, 얇지만 맹렬한 빛이 새어 들어온다. 희뿌연 연기 속에, 가느다란 빛의 기둥이 드리운다.


누군가 울기 시작한다.


“저게 뭡니까?”


일리야가 묻는다.


“센서!”


시도지가 주변의 전쟁 의회 장교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한다.


“저 빛의 근원을 당장 찾아라! 분석해!”


몇몇이 더듬더듬 콘솔로 돌아가 불확실한 표정을 짓는다.


“방폭창 개방.”


산드린 이카로가 입을 연다.


“전술의 여주인이여, 우리는-”

“빌어먹을 방폭창을 열어요.”


이카로가 말한다.






테라 저 높은 곳, 4만 척에 이르는 전함의 대군으로 이루어진 반역자 함대는 끔찍한 침묵 속에 잠긴 채다. 그 함체 위로, 죽어가는, 반쯤 파먹힌 채 태양의 굳어가는 빛이 빛난다. 태양계에는 더 이상 공간도, 열린 공허도 없고, 그저 워프의 격류에서 흘러나오는 독기가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비물질이 방전되는 매개 속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그 아래, 테라의 곡선이 펼쳐진다. 옥좌성의 형상은 오물과 부패에 취한 독기 어린 반구를 그린다. 그 지표는 구름과 연기, 오염물질이 겹겹이 층을 이루어 가려진 뒤다. 대기는 그 속에 고통받고 있다. 나라 크기에 버금가는 크기의 갈색 연기 기둥이 소용돌이치며 굳어간다. 간혹 폭발과 궤도 포대가 뿜어내는 섬광 속에 어둑해지고,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천공의 벼락을 몰아치는 무의 폭풍이 대지의 지표를 뒤흔든다. 질식할 듯 숫은 구름에는 지독한 독성이 엉겨 있고, 끈적하리만큼 밀도가 높다. 테라는 마치 타올라 버린 가스 거성을 떠올리게 한다.  안개의 수의로 덮인 무덤을 연상하게 한다. 연기가 씻겨나가고 나면, 아마 죽어버린 재만이 남아 있을지도 모를 형상이다. 스모그로 질식한 영역이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부터 무의 독기가 시작되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깜빡임이 임한다. 숨 막히는 연기의 덮개 사이로, 100킬로미터 아래에서 섬광이 번쩍인다. 구름 아래, 희미한 섬광이 비친다. 그리고 사라진다. 다음 순간, 또 다른 섬광이 벼락처럼 번쩍인다. 그리고 세 번째 섬광이 비친다. 섬광이 솟을 때마다, 반역자 함대 함선들의 센서를 자극하는 난해한 사이킥적인 쿵쿵거림이 들려온다. 숨죽은 듯 쿵쿵대는 울림은 지진처럼 저 깊은 곳에서 밀려온다. 잡음이 으르렁거리며 끓어오른다. 초저주파 고동이 울린다. 복스 시스템이 마치 도살장의 활송 장치에 실린 가축들처럼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기 시작한다.


또 한번 섬광이 터진다. 그리고, 이 섬광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커진다. 부풀어 오른다. 마치 망토를 자르는 칼날처럼, 독성 연기가 그 앞에 갈라지며 불타오른다. 원초적인 분노 속에, 섬광이 대기권의 폐색을 뚫고 초궤도 공간으로 뻗친다. 희석된 바 없이 백열하는 얇은 광선이 테라로부터 끊임없이 뿜어진다.


폭을 재면 5킬로미터가 될까 싶은 가느다란 빛의 흐름에 끝이 없다. 마치 탐조등처럼, 테라로부터 태양계에 드리운 거짓 밤을 향해 빛이 뻗친다. 불가능할 정도로 밝은 빛이다. 그 빛의 진로에 잡힌 여섯 척의 반역자 함선들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다. 방사 슬리브 범위의 궤도에 정박해 있던 십수 척의 다른 함선들은 즉시 불타오르는 것은 면했지만, 동력 시스템이 파괴되고 회로가 튀겨지면서 대형으로부터 흐트러진 채 이탈한다.


아스트로노미칸에, 다시 불이 붙었다.






테라로부터 80광분 거리, 토성의 고리를 망토 삼아 숨어 있던 태양계 전투함대의 잔해가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함인 팔랑크스가 엔진에 불길을 더한다.


“제독.”


할브락트가 입을 연다.


“아직 저것이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소.”


허스칼은 여전히 속삭이듯 말하고 있다. 니오라 수-카센은 답하려 입을 연다. 몇 달만에 처음 평범하게 입을 여는 순간이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은 느낌이지만, 곧 제독이 평범한 목소리로 답한다.


“상관 없습니다, 존경하는 벗이여.”


수-카센이 답한다.


“저나 당신이나, 저것이 무엇인지는 똑똑히 알지 않습니까.”


할브렉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센서 디스플레이는 방금 그들이 포착해 등록한 광자 신호의 정도를 명확하게 보인다.


“의심의 여지는 없소.”


여전히 속삭이며, 할브렉트가 동의한다.


“하지만 저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잖소. 확인 없이 함대를 투입해서는-”

“오,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할브렉트.”


수-카센이 대꾸한다.


“확실히, 할 수 있습니다.”


함교의 지휘 옥좌 위에 수-카센이 앉는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함선의 운영 체제가 저전력 후면 상태를 해제하고 깨어나기 시작한다.


“아스트로노미칸에 불이 켜졌단 말입니다.”


수-카센의 말이 이어진다.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 겁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경의 주의력은 실로 훌륭합니다.”


수-카센이 말한다.


“하지만 검증은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저것이 테라에서 보낸 승리의 신호일 수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 함대가 긴급하게 필요한 상황입니다. 아니면, 우리가 두려워하던 그 순간을 알리는 소환장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군이신 황제 폐하를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구출해서 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 함대의 필요성은 더 긴급해집니다. 어느 상황이건, 우리에게 신호가 온 것은 확실합니다. 저는 함대를 투입할 것입니다. 진입합니다. 더 이상 기다릴 시간도, 낭비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저 신호가 워마스터가 승리를 거두고 자신의 찬탈과 승리를 알리기 위해 붙인 불길이라면 어찌할 생각이오?”


할브렉트가 묻는다.


어깨를 으쓱인 수-카센은 수척한 미소를 짓는다.


“그럼 우리가 숨어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수-카센이 묻는다.


“죽게 될 거라면, 잘 죽기라도 해야죠.”


할브렉트는 뒤로 한걸음 물러선 뒤, 주먹을 가슴에 올려 제독에게 군례를 올린다. 다시 할브렉트가 함교 쪽으로 돌아선다.


“총원 전투태세!”


할브렉트가 외친다.


“총원 전투태세! 당장 배치를 마쳐라! 교전에 대비하라! 방어막을 켜고 전 포대에 동력을 공급하라!”


수-카센은 자리에 몸을 묻은 채, 금빛 복스 마이크의 스위치를 켠다.


“수-카센 제독이다.”


그녀가 입을 연다.


팔랑크스에서 함대에게. 전 함대 구성원, 본함을 중심으로 대형을 편성하고 전진 가속을 시작한다. 총원 전투태세! 교전에 대비하라. 강습 패턴 도미누스 알파-2-2. 목표까지 74분이다. 전 함장, 최종 목표 지점까지 진행 경로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이 예상된다. 도미누스 알파-2-2에 기반해 진입하되, 전투 구역 돌입 후 실제상황에서는 재량대로 행동하도록. 상황이 계속 변화할 것이다. 최선의 판단을 내리도록. 필요하다면 급편 대응도 허용한다. 저 개자식들에게 지옥 맛을 보여주고, 내가 제군을 보냈다고 똑똑히 전하도록.”


수-카센은 마이크를 옆으로 치운다.


“테라와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수-카센이 함교 전체에 들리도록 외친다.


“주 엔진 가동! 전속 전진!”






에오니드 티엘이 센서 통제관으로부터 신호 회로판을 받는다. 그 얼굴은 창백하고 어떤 말도 하지 못하는 채다. 티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략실에 있는 길리먼에게 바로 회로판을 가지고 간다.


프라이마크는 회로판을 건네는 티엘을 힐끗 바라본다.


“아스트로노미칸입니다.”


티엘은 간단히 보고한다.


길리먼은 회로판을 보지조차 않는다.


“그럼 이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확실히 보이겠군.”


길리먼이 입을 연다.


“놈 역시, 우리가 놈을 죽일 때 우릴 볼 수 있겠지. 함장, 주 엔진을 즉시 가동하도록. 총원 전투 태세로. 전투 대형을 짜고 전진한다. 우리 위에 빛이 비쳤으니, 이제 우리가 놈들을 계몽할 차례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신다면, 홀로 싸우실 수는 없다.”






당신의 궁정에 새겨진 창 위로, 빛이 드리운다. 검은 채색 모자이크 유리임에도, 너무도 밝은 빛이 뚫고 들어온다. 당신의 아비가 세운 또 다른 계획이요, 또 다른 반격이며, 또 다른 절망적인 노력이다. 대체 당신의 아비는 얼마나 많은 계획을 세운 것인가? 얼마나 많은 계책을 짜낸 것인가? 그 모두 중에 하나라도 성공하기를 바라며, 모조리 실행에 옮긴 것인가?


그리고 이것은 확실히 효과적이다. 저 빛은 당신에게 상처를 새길 것이요, 좌절을 키울 것이다. 이것은 다른 이들을, 아비의 증원군을, 당신이 붙들어 놓고 있던 이들을 끌어들일 것이다. 이 빛을 따라 충성스러운 무릎 위의 애완견처럼 로부테, 사자, 그리고 러스가 밀려들 것이다. 자신들이 테라에 부재했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또한 복수를 청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오랫동안 당신은 양면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 애썼지만, 마침내 그 전쟁이 당신에게 이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사실, 더 이상 양면 전쟁은 없으니까. 테라는 이미 끝장난 채다. 그리고, 로켄은 마치 당신의 아비가 아직 살아 있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양 굴지만, 당신의 아비도 이미 끝장난 채다. 저기 갑판 위, 반쯤 죽은 채 널브러진 당신의 아비를 보라.


먼지투성이 육신 옆에, 타로 한 장이 떨어져 있다. 등불. 그래, 참 흥미로운 카드다. 그 모든 사소한 계략들이 다 우습다. 이것을 위해서, 시간을 벌기 위해 당신의 아비가 당신과 이렇게 오래 무익한 싸움을 벌였단 말인가? 그토록 많은 대가를 치르면서? 그렇다면 정말 낭비라고밖에 할 수 없다. 실로 어리석은 계략 아닌가. 로부테가 도착하고 나면, 저 빛은 그저 아비의 시체를, 그리고 당신의 장엄한 힘을 비출 따름이리라. 아마 당신을 보자마자 로부테는 도망칠 것이다. 탕아가 된 형제를 예상하며 왔겠지만, 여기서 그가 형제 대신 마주하게 될 것은 신이기에 그러하다.


그 묵시가 그를 무너뜨릴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당신은 분노한 채 달려오는 그의 함대를 빠르게 흩어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다른 이들에게 그랬듯이, 당연히 조건을 제시할 것이다. 길리먼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지켜보는 것 역시 흥미로우리라. 로부테는 그 제왕다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실용주의자 아니던가. 아마 자신이 싸울 수 없는 상대와 마주했음을 즉시 깨닫게 되리라. 그리고 어쩌면, 마침내 공포가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 당신은 그가 협상 끝에 당신에게 굴복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옥좌 정도는 언제든지 더 만들 수 있다. 그의 무릎이 숙이는 법을 알기는 하는지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자와 러스는, 글쎄… 당신은, 그 둘 모두를 어떤 망설임도 없이 죽여야 할 것이다. 코락스도 마찬가지다. 그들 모두, 로부테의 정치적인 음험한 술수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전부 다, 전사에 지나지 않는다.


여전히, 그들 모두에게 월드브레이커는 깔끔한 일격을 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 당신의 제단이 그들의 해골을 기다린다. 당신의 발톱 역시 식욕이 들끓는다.


말이 나온 김에… 당신은 아비에게 몸을 돌린다. 물론 슬픈 일이지만, 시간은 다했다. 이제 당신은 유예를 베푸는 데 지친 채다. 당신의 아비는 온갖 속임수를 동원하며 당신의 제안을 거부하는 데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가.


로켄이 당신을 멈추려 한다. 하지만 당신은 로켄을 옆으로 밀친다. 당신의 가련한 아들은 현혹당한 채다. 그리고 그 충성 속에 고통스러워한다. 마치, 아직 듣고 반응할 수 있는 존재라도 되는 듯, 당신의 아비에게 계속 외치고 있다. 마지막 한 가지 영리한 속임수가 남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있었다. 아스트로노미칸이 그 마지막 속임수였다. 하지만 충분치는 못했다.


당신은 월드브레이커를 휘둘러 아비의 해골을 부순다.





그냥 한 편 더 할래. 얼마 안 남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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