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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보 슈사쿠 일대기 퍼옴 (스압)

ㅇㅇ(121.133) 2017.12.04 22:03:57
조회 2076 추천 12 댓글 2

제1대 혼인보 산사(算砂)를 <기성(棋聖)>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업적에 경의를 표했던 것이어서,

당시는 물론 제일인자였지만 후세의 눈으로 보면 기술적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다.

현재 <기성>이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기사는 에도시대 중기, 즉 17세기 후반에서는 4대 혼인보

도사쿠(道策), 에도 말기 즉 19세기 중반에는 14세 슈와(秀和)의 아토메(후계자) 슈사쿠이다.

그가 입문한 직후 혼인보가의 당주였던 조와(丈和)는 그 대국을 한번 보고서 

"이거야말로 150년 이래의 천재이다. 우리 가문은 이로부터 크게 발전할 것이다." 

라고 간파하였다. 150년 전이란 바로 도사쿠(道策)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분명히 슈사쿠의 재능은 보기 드문 것이었지만 그것을 진흙에 파묻히는 일이 없이 크게 꽃피우게

한 것은 주위 사람들의 깊은 애정이었다. 빈고노구니(備後國:히로시마켄) 인노시마(因之島)

도노우라(外之浦)에 사는 농민의 둘째아들 토라지로(虎次郞)의 바둑 재능은 오노미치(尾道)의

상인 하시모토 기치베에(橋本吉兵衛)가 발견하여 미하라(三原)성의 성주에게 여쭈었다.

그리하여 성주 아사노 카이노카미(淺野甲斐守)의 호출을 받고 성중에서 대국하는 영광을 얻었다.

성주는 6세인 아기에게 봉록을 주어 영내에 있는 호센지(寶泉寺)의 호신(保眞)스님에게 아이의

교육을 명하였다. 아마추어이지만 호신스님은 3단의 실력이었다. 이전에는 원래 프로와 아마추어는

실력 차이를 두지 않고 전문적으로 바둑을 두어 먹고사느냐, 다른 직업에 종사하느냐의 차이점뿐이었다.

일본 전국의 유단자 250명, 빈고노구니(備後國)에는 면장을 받은 자가 4명밖에 없었던 시대의 3단이므로

스님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수업의 제일단계라는 중요한 시기를 이처럼 훌륭한 스승 밑에서 배우게 된 것은 슈사쿠로서는 최고의 행운이었다.

뒤에 사카이 고잔(坂井虎山)에게 한학(漢學)을 배우고 라이 산요(賴山陽)의 장자 라이 쓰안(賴聿庵)에게서도 정신적인

지도와 감화를 받았다. 유년기와 소년기를 슈사쿠는 이처럼 물심양면으로 최고의 환경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랬기 때문에 에도에 나가서 혼인보가의 사람이 된 뒤에도 슈사쿠가 고향에 대해서 쏟은 애정은 대단한 것이었다.

길흉을 가리지 않고 조그마한 일이라도 편지로 알렸으며, 1837년 만 8세 때 에도에 와서 2년 뒤 초단을 인허 받자

그 다음해에는 서둘러서 귀향하여 미하라 성주, 기치베에, 스님 등 빠짐없이 찾아 뵙고 보고하였다. 

이 때는 1년 넘게 고향에 머문 후 1841년 8월에 떠났는데 에도로 향하는 도중 오사카(大坂)에서 나카가와

준세쓰(中川順節)와 대국하였다. 준세쓰는 겐난 인세키의 문하인으로 5단, 오사카 제일의 기사였다.

칫수는 슈사쿠가 초단이므로 두 점 접바둑, 대국은 4판 이루어졌는데 모두 슈사쿠의 불계승이었다. 

"세상에, 무서운 아이가 있군. 이런 정도라면 앞으로 어디까지 올라갈 것인가?" 

준세쓰는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 해 9월, 조와(丈和)의 뒤를 이은 조사쿠(丈策)의 권유로 그의 한 글자를 얻어서 슈사쿠(秀策)로 이름을 고쳤고

바로 뒤에 2단 격으로 승단. 42년 7월에 3단격, 43년 10월 4단이 되었다. 입문하고서 6년, 아직 14세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였다. 유명한 <슈사쿠식 포석(秀策流 布石)>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1844년, 승단을 보고하기 위해 다시 고향을 찾았다. 이번에도 역시 일년을 넘게 머물렀다. 그는 대단한

달필이었는데 이 기간에 공부한 것에 힘입은 바가 많다. 1846년 4월, 에도를 향해서 출발했다.

그 유명한 <이적(耳赤)의 한 수>는 이 여행길에서의 대국에 나타난다. 


기사들의 여행은 또한 다시없는 바둑수업의 길이기도 하다.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도중에 각지의 강호들을 찾아서

대국하면서 실력을 연마한다. 에도에 버금가는 대도시인 오사카는 누구나 한번은 들르게 되는 곳이다. 슈사쿠는

나카가와 준세쓰를 방문해서 두 번째의 대전을 가졌다. 치수는 <선상선(先相先):바둑의 치수. 하수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세 판을 한 단위로 하여 흑번, 백번, 흑번으로 대국한다. 옛날에는 흑, 흑, 백의 순서. 프로의 대국에서

1단의 차이. '선호선(先互先)'이라고도 한다.>으로 첫 번째보다 훨씬 올렸는데 이번에도 슈사쿠의 전승이었다. 

"깨끗이 졌습니다. 극히 짧은 동안에 놀랍게 발전하셨습니다.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대항이 되지 않는군요." 

4국 째도 완패한 준세쓰는 아낌없이 감탄한 다음 이렇게 제안하였다. 

"슈사쿠씨, 바쁜 여행길이 아니라면 얼마동안 오사카에 머물러 줄 수 없겠습니까?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저의 겐난 스승님이 오랫동안 이곳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공교롭게 볼일이 있어 이세(伊勢)에 출타하셨는데 가까운

시일 안에 돌아오신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제가 주선하겠으니 한번 대국 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오히려 이쪽에서 바라 마지않던 제안이었다. 슈와(秀和)의 분전에 의해 메이진 고도코로(名人碁所)에의 야망은

저지 당했다고 해도 8단 준명인인 겐난 인세키는 바둑계에 우뚝 선 거봉이었다. 지금 대전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일생 그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꼭 대전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인세키님께 아무쪼록 잘 여쭈어 주십시오." 

준세쓰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인세키는 그 애교가 있는 곰보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불쾌한 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고 한다. 자기의 제자가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혼인보가의 소년에게 무참히 패배했던 것이다.

이노우에(井上) 가문의 명예에 관계되는 일이다. 대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코가 납작하게 만들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대국해보기로 하지. 그러나 치수는 두 점을 접고 두는 거야. 이 점을 승낙한다면 대국을 허락하지." 


7월 20일, 준세쓰의 집에서 대국은 개시되었다. 100수를 조금 넘었을 무렵,

그때까지 진지한 얼굴로 장고에 들어가 있던 인세키가 돌연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하하하, 이건 치수가 잘못 되었군. 두 점을 접어서는 도저히 바둑이 되지 않는군. 내일, 새롭게 선번(先番)으로 두도록 하지." 

그날 안으로 소문은 온 오사카에 화악 퍼졌다. 

"저의 집에서 두어 주십시오." 

하고 바둑을 즐기는 호사가들이 줄을 지어 자기 집을 대국장소로 제공하겠노라고 청해오는 것이었다.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이노우에가의 당주와 미하라(三原)의 아기중으로 이름이 높은 혼인보가의 기린아.

자기 집에서 대국을 가지게 된다면 자자손손에게 화제를 물려줄 수 있는 것이다. 어디서는 두고 어디서는

두지 않는다는 것도 난처하므로 병법가 인세키가 계책을 내어 적당한 곳에서 봉수하고 다음 집에서 속행하는 식으로 몇 집을 돌며 두기로 하였다. 


첫째 날, 89수까지로 봉수했는데 슈사쿠는 초반에 실패하여 형세는 인세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기보에서 백10으로 <대사 걸침>, 20으로 민 것이 인세키가 연구해 두었던 비장의 묘수. 슈사쿠가 크게 고전,

패를 걸어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64까지의 갈림은 백에게 불만이 없고 흑은 선착의 효과가 반감되어버려

승부를 걸어야 할 바둑이 되고 말았다. 

둘째 날은 하루를 걸러서 장소를 바꾸어 재개되었다. 여전히 인세키는 이곳저곳 교묘하게 두어 백의 우위는

움직임이 없었다. 준세쓰를 비롯하여 별실에서 검토하고 있던 제자들은 

"이미 스승님의 승리다. 슈사쿠라고 해도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 

고 모두 스승의 승리를 장담하고 있었다. 그 때 대국실로부터 소안(宗庵)이라는 의사가 별실로 들어왔다.

그는 하라게(原家)를 출입하는 한의사였다. 바둑은 잘 모르지만 일류기사들의 시합을 지켜보려고 대국실에서

반각(半刻:7∼8분)이나 관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습니까, 소안 선생님. 승부는 이미 우리 스승님의 것이겠지요?" 

"글쎄, 나는 바둑을 잘 모르지만 반드시 인세키님이 유리하다고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군요." 

"예? 그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실은 방금 전에 소년이 <천원> 부근을 두었는데 돌소리도 높이 울리도록 힘차게 두들겼지요.

그것을 보고 인세키님은 앉은 자세를 바로 하셨는데 한참 후에 양쪽 귀가 빨갛게 되었지요.

의사들의 보는 바에 의하면 뜻밖의 일에 부딪쳐 신경이 곤두섰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붉어지는 것이지요. 소년의 한 수가 어쩌면 인세키님의 의표를 찔렀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용이하지 않은 형세이겠지요." 

소안이 말한 <천원 부근의 한 수>가 흑127이다. 그 전에 백이 126으로 둔 것은 320자리에 흑의

하변 위협을 피하고 흑에게 174자리로 나와 끊게 하여 여기에 <뒷맛>을 남기려는 것이다. 

소년은 인세키의 의도를 민감하게 파악하고 흑127로 거부해버린 것이다. 착점되고 보니 4통 8달,

과연 판 전체를 곁눈으로 노려보는 <요처(要處)>이다. 우세를 확신했던 인세키가 심적 동요를

일으켜 귀를 발갛게 물들인 것도 무리가 아닌 일이었다. 이 한 수가 역사상 유명한 <이적(耳赤)의

한 수>이며, 또는 이 대국을 귀가 붉어졌다는 <이적국(耳赤局)>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이하의 착수는 그 어느 수나 흑127의 한 수를 의식하고 두어진 것이다. 소년 슈사쿠는 눈부시게

분전하여 힘차게 비세를 만회하여 나갔다. 흑229까지 보기 좋은 역전이었다. 이후 100수에 걸쳐서

인세키는 패싸움으로 몰고 갔지만 슈사쿠는 한 치의 잘못도 범하지 않고 패에 이겨 승리를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325수로 종국. 흑 3집 승이었다. 

인세키와 슈사쿠는 도합 세 판을 두었지만, 한 판은 <치수>에 핑계를 댄 인세키의 일방적인 중단이었고

계속된 이 판과 다음 판은 슈사쿠가 승리하였다. 인세키는 아무래도 혼인보 가문에는 이기지 못할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그 후 인세키는 중국으로 밀항할 꿈을 품고 문하인 미가미 고잔(三上剛山)과

규슈(九州)로 향했다. 도중 오노미치(尾道)에서 하시모토 기치베에(슈사쿠의 재능을 발견한 사람)를

방문하여 며칠 머물렀을 때 이렇게 말하였다. 

"그 당시 슈사쿠에게는 이미 7단의 역량이 있었지. 앞으로 어디까지 강해질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야.

개천의 용, 틀림없이 하늘로 오를 것이야." 


<이적(耳赤)의 한 수>로 겐난을 타도한 슈사쿠는 에도에 도착하자 이내 5단으로 승단하였다.

또 은퇴해 있는 조와 당주 조사쿠 아토메(후계자) 슈와의 일치된 의견으로 

"언제인가 슈와가 당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 슈사쿠를 아토메로 한다." 

고 결정되어 슈사쿠의 승낙만 남게 되었다. 이 이상 명예스러운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슈사쿠는 승낙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연로한 부모, 자기를 길러준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고향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성주인 아사노(淺野)님은 어렸을 때부터 계속해서 녹봉을 주고 있다. 성주는 결코 부유한 형편은 아니었다.

어려운 재정 속에서 자기와 같은 자에게 어렸을 때부터 녹을 준 은혜는 잊을 수 없다.

이것 한가지만으로도 혼인보가의 후계자가 되어 신분상 고향과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그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슈사쿠의 사정을 들은 조와는 당장에 지샤부교(寺社奉行)인 와카자카 아와지노카미(脇坂淡路守)와 의논하여 미하라

아사노(三原淺野)의 종가인 히로시마 아사노(廣島淺野)가에 설득을 의뢰하였다. <한슈(藩主):영주> 사이테이(齊鼎)의

설득으로 성주도 승낙하였다. 슈사쿠의 영예를 기뻐하면서도 성주, 기치베에, 호신스님 등은 장중의 구슬을 빼앗긴

심경이었을 것이다. 슈사쿠는 아토메가 되면서 동시에 조와의 따님 하나코(花子)를 처로 맞아들일 것도 결정하였다. 

1847년, 조사쿠와 조와가 뒤를 이어 타계하였다. 슈와는 14세 혼인보를 상속하였고 이듬해 슈사쿠의 아토메(후계자)청원은

정식으로 허가되었다. 6단으로 승단하고 하나코와 결혼하였다. 만 19세였다. 이듬해에는 7단진의 최강자인

오타 유조(太田雄藏)를 <호선>의 칫수로 추격하여 자신도 7단으로 승단하였다.


어전대국은 연전연승으로 패배하는 법이 없어 기사들 사이에는 

"선번(先番:흑을 쥠)이었습니다." 

라는 유행어를 퍼뜨리고 있었던 시대이다. 

이것은 어느 바둑 애호가가 슈사쿠에게 어전대국의 결과를 물었을 때 <이겼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선번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한 데서 비롯된 것이지만, 실제로 슈사쿠가 대답한 말은 

"운이 좋았지요. <선번>이었으므로 요행히도……" 

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앞뒤가 짤린 채 <선번>이었다, 라는 말만 남았던 것이다.

그만큼 슈사쿠는 세었고 특히 흑을 쥐었을 때는 천하무적이었다. 

호적수이고 유일하게 거북한 상대였던 오타 유조(太田雄藏)와의 30번기에서 치수를 <선상선(先相先)으로 고치게 하였고

어전대국(오시로고)은 19연승이라는 무패의 행진, 이제는 대적할 자가 없었다. 하나코와의 사이도 아이는 없었지만 지극히

원만하여 병약한 처를 위해 조슈(上州)의 이카호(伊香保)에 탕치(湯治)하러 가기도 하였다. 고향에도 네 번이나 돌아갔으며

그때마다 그를 흠모하여 초대하는 자가 많았다. 각지를 여행하며 일화도 많이 남겼다.


슈사쿠가 얼마나 부모를 생각하고 고향 사람들의 은혜를 무겁게 여기고 있었는가는 먼길을 마다 않고

거의 5년에 한번 꼴로 귀향했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엄청난 수의

편지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어전대국(오시로고)의 성적과 모습, 에도(江戶) 시내의 모습,

신변에 일어난 사소한 일까지 자세하게 적어서 때로는 금품과 함께 히캬쿠<飛脚:에도(江戶)시대,

편지·금품·화물 등을 송달하는 발이 빠른 사람.>편에 보내곤 하였다. 예를 들어 자신은 19연승의 위업을

달성했고 스승 슈와가 <겐난의 혼령이 깃든 판>에서 마쓰모토 긴시로(松本錦四郞)에게 패배했던 1861년의 어전대국에 관해서는 

"금년도 이겼습니다. 안심해 주십시오. 그런데 스승님이 의외에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해 유감천만입니다.

스승님의 기량으로는 긴시로 쯤은 한 손으로 두어도 이기기 마련인 것인데……

(중략)바둑이란 살아있는 것이어서 이런 결과도 나오는가 봅니다." 

이렇게 쓰고 있다. 이 편지를 보낸 한달 후 고향에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고 그는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잡고 오직 놀라고 있을 따름입니다.

아버님을 비롯해서 여러분들의 슬픔과 아픈 마음을 헤아릴 때 무어라 여쭐 말씀이 없습니다.

현격한 거리를 둔 머나먼 곳이라 간병조차 못해드린 이 불효자는 엎드려 용서를 빌 따름입니다." 

라고 임종을 못한 불효를 빌며 백일의 상을 입고 <정진생활(精進生活):복상(服喪) 중일 때 육식을 피하고

채식만 하는 것.>로 들어갔다. 날 것(조리하지 않은 생선류. 특히 일본인이 즐기는 회 따위)을 삼가고 채식만 들었다.

이 기간에 슈사쿠는 표고버섯을 과식하여 그 탓으로인지 머리에 종기가 나서 많이 쇠약해졌다.

상심에 젖어있는 슈사쿠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놓으려는 듯 재난은 거듭되었다.

고향의 후원자인 하시모토 기치베에(橋本吉兵衛)가 타계하고, 1862년 5월부터 크게 번진 전염병에 결국

슈사쿠마저 걸리고 말았다. 그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경과를 그의 처 하나코가

고향의 시아버님께 보낸 편지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편지는 1,200자나 되는 장문의 것인데 원문의 뜻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알기 쉽게 고쳐 썼다. 


"슈사쿠(아내가 윗사람에게 대해서 남편을 말할 때는 이렇게 이름을 직접 말함.)는 이 달(8월) 3일부터 발병,

4일 낮 무렵까지는 이렇다 할 것은 없었습니다만 오후가 되자 토하며 크게 괴로워하였습니다.

의사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오도록 하고는 모두들 어쩔 줄 모르고 허둥거리고 있을 때 이토 쇼와(伊藤松和)

사형(師兄)님이 제자를 대동하고 오셨고 밤이 되어 의사도 도착하여 조처를 한 다음부터는 날마다 차츰

회복하는 기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9일 아침에는 거의 나았다고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10일 아침부터 갑자기 용태가 변하면서 헛소리마저 하여 의사가 한시도 옆을 떠나지 않고

약을 먹이는 둥 갖은 애를 쓰셨지만 결국 자정에는 사거(死去)하였습니다. 

혼인보님(秀和)을 비롯해서 가문 일동이 꿈을 보는 듯, 아무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먼저 세상을 떠버려,

그저 어쩔 줄 모를 따름입니다. 금년 이른봄부터 몸이 좋지 않았고 머리에 종기가 났었는데 봄의 정진(精進)

중에 표고버섯을 세끼마다 먹은 탓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가족 모두가 홍역에 걸려들어 눕게 되자

슈사쿠는 약심부름이며 간병을 혼자서 빠짐없이 하였고 내가 홍역에 걸려도 종기로 독을 취하고 있으므로

가볍게 끝날 것이라고 하여 저가 당신은 홍역을 치렀느냐고 물었더니 옛날 일이어서 잘 모르겠고,

물어서 확인하려고 해도 고향이 워낙 먼 곳이라 지금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이므로 설마 하고 있었는데 병에 걸린 저를 염려하여 참으로 지성껏 간병하여 주었습니다.

앞으로는 누구도 돌봐줄 사람 없어 무엇 하나 손에 잡히는 일이 없이 아침저녁으로 울며 지낼 뿐입니다. 

이러한 일은 연로하신 아버님께 여쭙는 것이 상심만 더하시지 않을까 참으로 주저됩니다만 병상의 경과를

자세히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시아주버님과 시누이님에게 아무쪼록 잘 전해주십시오.

마음이 산란하여 횡설수설이 되었사오니 읽기 어려우실 것입니다만 아무쪼록 잘 판독하여 주십시오.

슈사쿠가 홍역은 치렀던 것 인지요? 임종하기 전에 그와 비슷한 증상도 보여주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알고 싶습니다." 


8월 13일에 쓴 이 편지는 과연 메이진(名人) 조와(丈和)의 장녀답게 훌륭한 필치로 쓰였고

특히 후반부의 여자다운 문장은 읽는 자로 하여금 한 줄기 눈물을 유혹하여 마지않는다.

뒤에 <성난 얼굴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다>고 회상할 만큼 인자했던 남편을

애모하는 하나코의 마음이 글자 하나 하나로부터 전해져 오는 것 같다. 

슈사쿠의 사인(死因)은 당시는 홍역이라고 믿어졌고 혼인보가의 기록에는 폭사병(暴瀉病)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콜레라였다. 

슈사쿠는 바둑을 두기 위해서 태어났고 세상 형편이 바둑을 둘 수 없도록 돌아갈 무렵 서둘러서

이 세상을 떠나갔다. 바쿠후(幕府)말기의 떠들석한 격변은 바둑계라는 별천지에도 용서 없이

불어닥쳐 시중의 바둑회 따위는 차츰 모습을 감춰가기만 했고 슈사쿠가 죽은 이듬해부터는

어전대국도 열리지 않았다. 짧은 생애였지만 슈사쿠는 둘 수 있는 데까지 바둑을 두었고

그리고 죽었던 것이다. 이윽고 유신(維新)의 동란에 휘말려 그때까지 받던 녹봉도 박탈된

전문기사들의 비참한 말로를 생각하면 이 시기에 타계했다는 것은 슈사쿠를 위해서 다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슈사쿠가 병마에 걸리지 않고 고향에라도 칩거하여 건강한 채로 신시대를 맞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메이지(明治)초기의 바둑계는 상당히 달라졌으리라고 생각된다.

첫째로는 호엔샤(方圓社)가 성립되지 않았음에 틀림이 없다. 호엔샤의 초대사장은 무라세 슈호(村瀨秀甫)인데

그는 슈사쿠의 귀여움과 지도를 받고 혼인보가의 후계자로 자타가 인정하고 있었다.

그것을 조와(丈和)의 미망인이 소행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반대하므로 가문에서 떠나 호엔샤를 세웠던 것이다.

호엔샤의 설립은 1879년. 슈사쿠가 살아 있었다면 아직은 50세이므로 제일인자로 군림했을 가능성은 충분하였다.

주위의 인정을 받고 있던 슈호(秀甫)가 슈사쿠를 모시고 혼인보 가문을 착실하게 다스려 지난 날의

영화를 되찾았다면 그후 다무라(田村)와 가리가네(應金)에 의한 후계자싸움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따라서 오늘날의 실력 혼인보전(本因坊戰)도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33세. 너무 이른 슈사쿠의 요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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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3652 혜민누나 상대로 3점에 3집승했네 와 [1] ㅇㅇ(223.38) 05.27 73 0
943651 5단 성공하는거 처음보네 ㅋㅋ ㅇㅇ(223.38) 05.27 36 0
943650 그냥 인공지능 보급 이전 바둑과 이후 바둑은 다른 종목임 [7] ㅇㅇ(118.235) 05.27 76 8
943649 어 뭐야 구쯔 이겼구나 바갤러(125.178) 05.27 38 2
943648 바둑한판 둘사람 한큐8단 타이젬9단임 [6]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7 83 1
943647 홈런 여자인 척 하는거 왤케 웃기노ㅋㅋ [4] ㅇㅇ(211.36) 05.27 122 4
943646 김명훈vs김은지 예상승률 정리 [1] ㅇㅇ(175.223) 05.27 69 1
943645 그냥 지금이 빈집이라 외치는건 [1] 바갤러(106.102) 05.27 49 3
943644 <아이유,일반인 노래방안 모조리 훔쳐보고 공연> [2] 연예인범죄(211.36) 05.27 65 1
943643 안녕하세요 바갤오천원입니다 [4] 오천원(115.20) 05.27 62 7
943642 프로들이 쓴 책도 이해하라고 만든 게 아니라 그냥 따라하라는 내용인데 ㅇㅇ(210.98) 05.27 37 0
943640 Lizzie 바둑 프로그램 난이도조절 어캐해요? [9] 바갤러(121.172) 05.27 72 0
943638 그럼 이새낀 제한기전에서도 우승가능? [2] ㅇㅇ(223.38) 05.27 113 1
943637 그럼 72살에 우승했으니까 [8] ㅇㅇ(223.38) 05.27 165 8
943636 신체조건으로하는 축구하고 대가리로 돌만놓는 바둑하고 비교ㅋ [1] ㅇㅇ(223.38) 05.27 42 2
943635 현 한국국대축구가 98월드컵 가면 우승하겠냐? ㅇㅇ(211.234) 05.27 45 4
943634 빈집론 시작하는건 항상 이창호빠라니까 ㅇㅇ(223.38) 05.27 46 2
943633 내가 진짜 오청원이다. 오청원(221.168) 05.27 43 2
943632 최정도 어쩌다 결승가봤는데 초일류야? ㅋㅋ [6] ㅇㅇ(223.38) 05.27 101 3
943631 개웃긴것 ㅋㅋ 바둑유튜버중에 실력으로치면 김성룡이 2번째임 [1] 바갤러(211.234) 05.27 63 1
943630 입단이 제일 어려웠다는 세대가 80후반~90초반 6단바둑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7 82 1
943629 이창호 때는 프로가 되는 것 자체가 별 따기 였음 [4] ㅇㅇ(125.176) 05.27 160 11
943628 인공 공부도 실력이 되야 하지 6단바둑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7 46 0
943627 애들이 착각하는데 인공지능을 공부하려면 [7] ㅇㅇ(211.205) 05.27 120 4
943626 현존 최강의 인공이 카타고 28블럭인데 [1] ㅇㅇ(218.154) 05.27 46 0
943625 인공공부 어떻게 하는거임? [1] 바린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7 49 0
943624 원조빈집 오청원이 빈집을 논하노 [1] 바갤러(118.235) 05.27 53 5
943623 이창호 빈집맞지 시발 ㅋㅋ [1] ㅇㅇ(112.171) 05.27 79 2
943622 김성룡 2006년생이면 입단도 못했음 [2] ㅇㅇ(14.37) 05.27 144 4
943620 갑조리그: 쑤보얼항저우&용원명성항저우 [7] squeak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7 134 1
943619 김성룡이 2지명이라는게 빈집 증거 아니겠냐? [2] 바갤러(14.37) 05.27 12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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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3616 인공지능 등장이후로 가치있는책은 사활책밖에없음 [7] ㅇㅇ(223.38) 05.27 112 0
943615 김성룡 vs 레전드 상대전적 [5] 오청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7 148 4
943614 정환이형 올해 심상치 않다 바갤러(59.19) 05.27 8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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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3611 바둑 갤러리냐? 인공충 갤러리냐? 이것이 문제로다..ㅋㅋㅋ [7] 바갤러(116.127) 05.27 59 1
943610 남치형VS명지대, 진흙탕 싸움 시작 [2] ㅇㅇ(118.235) 05.27 11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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