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의 심장이자, 국가의 두뇌라 칭하는 웨스트 윙(West wing)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서늘하다 못해 살이 베일 정도의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로데론의 패륜아 - 아서스가 투구 하나와 서리한을 득템하고 리치 왕에 등극했을 때도 이런 위압감을 풍기진 않았을 것이다. 

운명과 변화의 휠체어를 소유한 대마왕, 루즈벨트가 서류를 한 장, 또 한 장 넘길 수록 그의 옆에 자리한 각료진은 식은 땀을 흘리며 지금 이 사태를 만든 '단 한 사람'을 향해 눈짓으로 오만 쌍 욕을 퍼붓고 있었다. 


CV-6, 엔터프라이즈의 미친개
원한 수확기
어니스트 킹조차 포기한 킹콩


이 휘황찬란한 칭호 3개를 가진, 바로 본인 되시겠다.

야발, 왜 이렇게 된 거지?


공기 중의 먼지조차 내려 앉지 못하고 미끄러질, 각 잡힌 부동 자세로 꼿꼿이 서 있으면서 '나는 소나무다, 나는 소나무다. 철갑을 두르고 솟아있는 소나무다.'를 머리 속에 구긴 채로 집어넣길 얼마였을까.


"브라이든 Y. 킴. 한국계. 나이는 21세, 부모는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자수성가 한 농장주.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추천을 받아서 해군 항공대에 입교하여 훈련을 성실히 배우고 높은 성적을 거두어 해군 항공대에서도 보기 드문 인물로 평가를 받았다..."

척 하고 닫힌 서류철의 덮개를 만지작거리던 중년의 손이 얼굴의 안경을 쓸어냈다. 

세월의 쟁기에 파인 이마 속에서 푸른 눈동자 한 쌍이 나를 향해 머무르는 걸 봄과 동시에, 나는 사람의 눈빛으로도 태풍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자네의 이력은 인상적일세, 킴 소위. 그 많은 아시아계 중에서 이토록 놀라운 능력과 성실함을 동시에 가진 인물은 보기 드물지. 더불어, 저 동쪽의 섬나라가 왜 진주만을 기습했고, 어떤 방식으로 전쟁에 임하며 행동할지 예측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세."

그렇게 푸근한 미소를 얼굴에 배어내나 싶더니, 이내 그 표정은 흉신(凶神)의 조각상처럼 험악해졌다.


"그렇게 뛰어나고 유능한 인재가 이 미합중국에 기거했다는 건 다행일지 모르나, 적어도 자네의 위명을 돋보이고 싶었으면 국가의 지도자를 모욕할 게 아니라 저 망할 잽스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죽여서 공을 쌓을지 생각해 본 적이 없나?"

독기가 몸에 가득 찬 숫사자의 으르렁거림이 내 목 주위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씨발, 홀시 함장님 말대로 생각 좀 하고 말을 뱉었어야 하는데! 젠장! 

온 세상의 압력이 내 몸으로 달려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날지 머리는 팽팽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잊지 말자, 이 당시 미국은 인종차별을 파문 호흡을 하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일임을.
괜히 중국의 손빈의 고사를 입에 담았다가 '갈! 감히 나를 저 저열한 중국의 노랭이와 같은 취급을 해? 여봐라! 저 놈을 매달아라!' 할 확률이 너무 높았다.


생각해라, 김용진을 대신한 망령아!
적어도 저 양반을 설득할 마법의 혓바닥을 휘둘러보라고!

"...노란 저주를 뒤집어 쓴 원숭이가 조지 워싱턴과 링컨을 들먹였다고 세상이 망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킴! 자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경악한 홀시 함장이 나를 향해서 화를 높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살기 어린 눈을 가진 미합중국 황상을 두고 중국 위인이나 유럽 위인을 저울에 혀에 올렸다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에.

나는 미국의 누구라도 인정할 인물을 매달아서 저 노인의 화를 달래야만 했으니까.

그런 발언에 모든 관료가 입을 벌리면서 경악을 드러냈지만, 어차피 밟은 페달은 멈추지 말아야 했다.

루즈벨트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리는 걸 눈에 담으면서, 생각해두었던 말을 계속 지르기로 했다.


"피부가 노랗다고 주님께 부여 받은 삶조차도 부정 당하는 아시안이, 휠체어를 타고도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위인을 좀 헐뜯는다고 해서 대통령 각하의 당선이 물려지는 것도 아니고 - 그 욕보다 더한 걸 들으시면서 백악관에 기거하시고 계신데 오히려 이쯤 되면 칭송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네..."

"전 한국계로서 저 일본인으로 취급 받기도 싫고, 허구한 날 원숭이라고 존재를 부정 당하면서 멍청한 딕시 촌놈 엉덩이를 닦아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상급자의 명령을 받들어 최선을 다해 수행했고, 그걸로 제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 각하를 씹으면 어떻습니까? 저도 미국인인데요!"


에라 씨발 몰라.
엎드려 빌어봤자 수용소 끌려갈 인생, 마지막이라도 떳떳하게 총살 당하는 게 낫겠지.

이제 김용진이라 불리는 망령은 바로 다가올 가혹한 운명을 기다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