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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세 후기 잉글랜드 농촌의 음식과 일상생활

prevo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4.21 05: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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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 식단이나 구매목록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다양한 자료를 통해 그들의 식습관을 재구성할 수 있다.

고고학 유적지에서 발견된 동물 뼈는 농민 식단의 동물성 단백질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러한 발굴은 소금에 절여 겨울 동안 보관할 수 있었던 돼지고기가 일반적인 단백질 공급원이라는 일반적인 가정과는 모순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유적지에서 돼지 뼈는 단지 4~13%를 차지했으며, 소 뼈는 18~46%, 양 뼈는 41~78%로 가장 흔했다.

뼈와 이빨에서 추정한 동물의 나이는 농민들이 동물을 살리기 위한 충분한 건초가 없었으리라는 이전의 가정과 달리 겨울에도 가축을 길렀음을 나타낸다. 워럼에서 발견된 양들은 2살 이후 도축되었지만 업튼에서는 더 오래 기른 것으로 보이며, 이는 양이 주로 양모를 얻기 위해 사육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는 대체로 2살에 도축되었지만 일부는 훨씬 더 오래 살았으며, 아마도 쟁기용 역축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기타 뼈에는 집에서 기르는 가금류, 거위, 토끼도 포함되었다.

고기는 매우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업튼에서는 늙은 동물들의 머리와 다리 부위는 먹지 않고 버렸다. 60% 정도의 소가 3살이 되기 전에 도축된 것은 연한 고기를 선호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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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자료의 한계

고고학적 근거가 매우 적다고 해서, 당시 식생활에서 돼지고기가 주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돼지는 아무거나 먹는 동물은 아니지만 체질이 강건하고, 당시의 법령들을 보면 길거리, 텃밭, 경작지에서 흔한 골칫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장원 법정 기록에는 도토리를 먹이기 위해 돼지를 숲으로 들여보내는데 드는 비용인 '도토리 먹이값'을 정기적으로 걷었다는 내용이 있다. 게다가 근세에 이르러서는 여름과 추수기에 가족이 돼지를 잡아 겨울과 봄에 먹을 수 있도록 집에서 키우기도 했다. 돼지뼈는 연하며, 염지하고 삶으면 쉽게 부서지기 때문에 주로 개나 심지어 돼지가 먹어 치웠을 가능성이 높다.

밀렵의 실태

고고학자들은 또한 야생동물의 뼈도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왕의 사슴이나 영주의 토끼와 새를 사냥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효과적으로 시행되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적에서는 사냥용 화살촉도 다수 발견되었다. 당시 밀렵 사건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야생동물 뼈의 부재에 대한 좀 더 타당한 설명이 나온다. 몰래 사냥한 고기는 숲에서 바로 도축되었고, 밀렵 사실이 탄로나지 않도록 가죽과 뼈는 그 자리에 버려두고 마을로 들여오기 쉬운 크기로 잘랐던 것이다.

밀렵꾼들의 변명은 기발하기도 했다. 연못에서 농어를 잡은 혐의로 기소된 한 남자는, 고기를 잡으려고 한 게 아니라 연못가에 누워서 손만 물에 담갔는데 농어가 손 안으로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내가 병으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데 농어가 몹시 먹고 싶다는 말을 했기에 마지못해 농어를 가져왔다고 했다.

생선, 가금류, 유제품의 섭취

생선과 해산물은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순절의 식단에도 포함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해산물 어업이 주요 산업이었고,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유적에서도 바닷고기의 뼈가 발견되었다. 민물고기 어업 중에도 상업적인 목적의 것이 있었지만, 주로 소년들이 지역 개울에서 고기를 잡도록 보내졌다. 해안 마을에서는 여성과 어린이들이 해변에서 조개를 주워왔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닭과 거위를 키웠다. 영주에 대한 크리스마스 공납은 종종 가금류나 달걀로 이루어졌으며, 영주가 그 음식을 영지민들과 함께 나눠 먹는 경우도 있었다. 비둘기는 비둘기장에서 기르거나 교회 첨탑에서 잡았다. 생후 3개월 된 비둘기의 고기가 특히 맛있다고 여겨졌다. 비둘기 뼈 역시 잘 부서지기 때문에 고고학 유적에서 발견되기 어렵지만, 당시 그림과 기록을 보면 사람들이 비둘기를 잡아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치즈는 당시 식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양젖, 염소젖, 젖소젖으로 만들 수 있고 장기간 저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찾기 어려운, 중세 잉글랜드의 유명한 치즈들도 있었다. 계란이나 생선과 마찬가지로 치즈도 사순절 기간에 중요한 식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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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 중심의 식습관

단백질보다 더욱 기본적인 식품은 다양한 종류의 곡물이었다. 농민들은 질 좋은 흰밀가루로 만든 빵을 선호했다. 성인전과 로빈 후드 이야기와 같은 문학 작품에서 하얀 빵이 환상적인 음식으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산업화 이전 시대에는 부드러운 흰 빵은 사치품에 속했고, 때로는 명절에만 먹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직전에 빵을 굽기 위해 특별히 방앗간에 가서 밀을 빻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고운 밀가루를 얻으려면 좋은 밀이 있어야 하고, 밀을 잘 갈고 체로 쳐야 했다. 오늘날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빵은 중세 농민들이 꿈꾸던 하얀 빵의 궁극적인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곡물 소비의 계층성

밀빵이 가장 좋은 식품이기는 했지만, 농민의 식단에서 가장 흔한 것은 아니었다. 흔히 밀과 호밀을 섞어서 '마슬린'이라는 가루를 만들었다. 범죄 기록에서, 마슬린은 도둑맞거나 범죄자들로부터 압수된 물건들 사이에 자주 언급된다.

영주 직영지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에 대한 방대한 자료가 있지만, 이는 주로 영주의 시장 판매용 작물이며 농민들이 무엇을 먹었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호밀이 잉글랜드 전역에서 재배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호밀빵이나 마슬린 빵의 소비는 지역적인 특성이 있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귀족, 수도사, 성직자,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엘리트들은 흰 밀빵을 먹는 기쁨을 누렸고, 하인들은 검은 빵을, 빈농들은 다른 곡물이 없다면 완두콩이나 콩으로 빵을 만들어야 했다. 14세기 말 농민들의 경제 형편이 나아지자 이러한 빵의 위계 질서에 문제가 생겼다. 존 가워는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옛날 노동자들은 흰 밀빵을 먹지 않았다. 그들의 음식은 콩과 거친 곡물이었으며, 마실 것은 물뿐이었다. 치즈와 우유가 그들에게는 큰 잔치였고, 보다 고급스러운 음식은 거의 먹지 못했다. 그들의 옷은 회색의 조잡한 천으로 만들어졌다.”

랭글랜드 역시 농민들이 콩빵을 거부하고 밀빵을 먹고 싶어한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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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 이외의 식단

기후가 춥고 습해 밀을 재배하기 어려운 지역에서는 호밀이나 보리와 함께 귀리도 식용으로 소비되었다. 대부분의 보리는 에일 양조를 위한 맥아 제조에 사용되었지만, 종종 질 낮은 보리를 귀리와 섞어서 큰 빵을 만드는 데도 사용되었다.

완두콩과 콩은 식단을 보충하는 영양식이었는데 빵으로 만들거나 죽으로 끓여 먹었다. 콩은 필요할 때 껍질을 벗겼다. 검시관 기록을 보면 12월 어느 집의 바닥이 콩 껍질로 뒤덮인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완두콩과 콩은 영양학적으로 중요한 작물이어서 수확에 대한 정교한 규정이 존재했다. 콩이 익어서 생으로 먹을 수 있는 짧은 기간에는 별다른 제약없이 맛있는 간식처럼 먹었지만, 대부분은 건조시켜 저장했다.

완두콩과 콩은 마을의 구호 작물이기도 했다.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마을 내규는 빈민들이 언제, 어떻게 이웃의 농지에서 콩을 수확할 수 있는지 규정했다. 이들은 콩밭 밖에 줄을 서야 했고, 일주일 중 특정 요일에 제한된 시간 동안에만 수확할 수 있었다. 마을 빈민들에게 이 콩 수확은 일주일 치의 저녁거리를 의미했다.

어린아이, 노인, 그밖에 노동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수확 후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권리를 가졌지만, 이 권리는 일반적인 빈민들에게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수확기에는 모든 건강한 남녀가 낫질, 단 묶기, 운반 작업에 참여했다. 날씨가 변덕스러워 시기가 중요했기 때문에 성직자와 도시민들도 수확 일에 동원되었다. 하지만 곡물을 줄기 중간에서 베고 단을 묶는 도중 곡식이 이삭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단 자체를 놓치는 경우도 있었다. 밭에서 이삭을 줍는 권리는 수익성이 있었고, 우리가 알다시피 부유한 집안의 여성들도 몰래 불법적으로 이삭을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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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는 잉글랜드 식단의 또다른 주요 요소인 에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시인 존 가워는 농민들이 자기 분수를 알았던 시절엔 물만 마셨다고 생각했지만, 많은 증거들은 이에 반한다. 에일 양조는 농가에서 흔했다. 가정용과 상업용 양조 모두 여성들이 주도했다. 에일의 품질은 천차만별이었다. 매우 걸쭉해 발효된 빵에 더 가까운 것도 있었지만, 품질이 좋은 에일은 도수가 높고 투명했다. 반면에 매우 순한 에일인 '스몰 에일'도 있었다.

에일은 단순히 영양가 있고 취하게 하는 음료일 뿐 아니라 특별한 사회적 의미도 가졌다. 누군가가 자신의 손자나 대자에게 양을 유산으로 남기지 않는다면, 대신 맥아 약간을 남겼다. 교구 길드에 가입할 때는 보통 맥아로 가입비를 지불했다.

와인은 일반 농가의 식탁에서는 보기 드물었지만, 수도원장의 창고에는 사람이 빠져 죽는 사고가 일어날 정도로 큰 와인 통이 있었다. 사과주는 남서부의 주요 음료였다.

식단은 과일, 채소 등으로도 채워졌다. 집 뒤뜰에는 체리, 사과, 배나무가 있을 수 있었다. 정원에서는 양배추, 부추, 양파, 마늘, 완두콩, 콩 등을 기르고, 다양한 허브로 음식에 맛을 내고 병을 치료했다. 농촌 사회에서 야생 채집이 차지하는 비중을 과소평가하기 쉽다. 여성과 아이들이 수로의 풀과 숲 속의 견과류, 야생 과일, 열매 등을 채집해 가계에 기여했다. 기근 때는 도토리를 모아 빵을 만들기도 했다.

조미료로는 정원의 허브, 식초, 소금, 꿀, 그리고 살 여유가 된다면 특별한 날에 후추, 커민, 시나몬과 같은 향신료를 사용했다. 주요 감미료인 꿀은 개인이 기르는 벌집에서 얻었다. 벌집은 가치 있는 물건으로 유언장에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도난의 대상이 되었다. 소금은 소금 팬을 이용한 제염으로 조달했다.

이러한 식습관은 건강식에 가까웠으며, 통곡물, 신선한 과일과 채소, 그리고 적은 양이긴 해도 다소간의 고기, 치즈, 생선이 추가돼 현대의 건강 칼럼니스트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발굴된 인골이 보여주는 증거에 따르면 농민들은 상당히 건장했다. 평균 신장은 165cm로,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조사된 치아 중 충치에 걸린 비율은 8.1%로 현대 잉글랜드보다 낮지만 앵글로색슨 시대보다는 높다. 척추와 관절에는 각종 관절염이 흔했으며 담석과 결석도 발견되었다.

나병 환자 묘지에서 발견된 치아는 상태가 좋았고, 다른 유골에 비해 마모가 적어 나병 환자들이 입안에 농양과 염증이 있어 부드러운 음식을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유골 중 두 구는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 힘든 노동을 했고, 나병으로 인해 비교적 빨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적당량의 식사를 권장하는 여러 운문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는 사람들이 건강한 식생활을 고려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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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내의 다양한 경제 계층에서 식량이 얼마나 풍부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경제적으로 가장 여유 있는 부유한 소작농들의 식습관은 "쟁기꾼이 주기도문을 배운 방법"이라는 문헌에 묘사되어 있다.

중세 시대 내내, 그리고 심지어 그 이후 시대에도 가난한 농민들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대규모 기근이 발생한 시기는 인구가 포화되고 날씨가 추워진 14세기 초반 무렵이었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극심한 기근은 1315-1321년에 발생했다. 처음 2년간 기근이 지속되는 동안 사람들은 거리에서 죽어갔다. 14세기 말과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인구가 감소하고 임금이 인상되면서 기근 상황은 개선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지만 일부는 여전히 자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의 최소 칼로리 섭취량과 실제 섭취량을 밝혀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페르낭 브로델은 칼로리 섭취량과 식단에서 곡물, 단백질, 음료가 차지하는 비율을 계산하려 했지만, 이러한 계산 결과는 기껏해야 모호할 뿐이며 확실한 증거가 없다. 두 명의 잉글랜드 경제사학자는 성인 남성이 하루에 최대 5파운드의 빵을 먹었고, 이는 주로 탄수화물로 구성된 식단으로 약 5천 칼로리에 해당한다고 계산했다.

브리드포트에 있었던 회계 기록은 음식이 부족하지도, 풍부하지도 않았던 교회 시설의 식사가 어땠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교구 사제들은 보통 가벼운 에일을 마셨고, 중요한 손님이 도착했을 때만 와인을 마셨다. 그들은 빵과 죽을 모두 먹었다.

사순절 동안에는 생선과 염장 생선, 유제품을 먹었지만, 사순절 이외의 기간에는 생선을 많이 먹지 않았다. 사순절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소고기, 양고기, 송아지 고기, 돼지 고기, 가금류를 먹었다. 무화과와 향신료는 사순절 음식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크리스마스 푸딩을 만들기 위해 아몬드, 건포도, 대추를 구입했다. 구매한 재료 외에도 채소, 과일나무, 비둘기장이 있는 정원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의 1인당 연간 지출은 평균 약 2파운드 15실링이었다. 두 명의 역사가들은 이들의 기록을 통해 지출 내역을 계산했다. 그 결과, 이들은 예산의 20%를 곡물류에, 35%를 고기와 생선에, 2%를 버터와 치즈에, 23%를 음료에 지출했다. 식량이 전체 예산의 80%를 차지했다. 연료와 조명에 추가로 7.5%의 비용이 들었지만, 의류와 같은 다른 비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브리드포트의 부유한 소작농들은 사제들과 비슷한 음식을 먹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농민 가정은 이러한 음식을 구입하기 보다는 직접 생산했을 것이다.

다른 자료들도 생계에 필요한 식량의 양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당대인들은 집과 텃밭과 1~2에이커의 경작지가 있으면 한 사람이 생활할 수 있다고 여겼다. 빈농 가족은 보통 3~5에이커의 경작지를 가졌다(별로 좋은 생활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구호소 기록에는 끼니를 제공받기 위해 잠시 들렀던 빈민들과 지역 연금 수급자들에게 배분된 식량의 양도 보존되어 있다. 가장 호화스러운 시설 중 하나인 셔번 구호소에서는 각 사람에게 매일 한 덩어리의 빵과 1갤런의 에일, 일주일에 사흘은 고기, 나흘은 달걀, 치즈, 청어를 제공했다. 버터, 채소, 소금도 항상 추가로 제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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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가 쟁기질이나 수확과 같은 집중적인 농사철 일꾼들에게 제공한 식사 역시 단서가 된다. 장원마다, 그리고 계절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고용된 일꾼들에게 제공된 식사는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일부 장원에서는 차이가 있었으며, 램지 수도원의 농민들은 이러한 차이를 적절하고도 재미있게 '에일.베드렙(영주가 식사와 함께 에일을 제공한 경우)', '워터베드렙(영주가 식사와 함께 물만을 제공한 경우)', '헝거베드렙(식사를 제공하지 않아 자신의 음식을 챙겨와야 했던 경우)'이라고 명명했다.

제공되는 식사의 양은 종종 장원의 관습법집에 기록되어 있었다. 서식스의 비숍스톤의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두 번의 쟁기질 노동에 대해 영주는 첫째 날에는 고기, 둘째 날에는 생선을 제공하기로 했으며, 둘 다 에일과 함께 제공되었다. 무거운 쟁기를 끄는 사람들은 영주의 식탁에 초대되었다. 수확기 첫날에는 먼저 죽, 흰빵, 소고기, 치즈가 제공되었고 다음 끼니에는 빵과 치즈, 원하는 만큼의 에일이 제공되었다. 둘째 날에는 수프, 흰빵, 생선, 치즈, 원하는 만큼의 에일이 제공되었고 다음 끼니에는 큰 빵 한 덩어리가 제공되었다.

수확기 노동에 제공되는 식사는 일반적인 식사보다 확실히 더 풍성하고 다양했는데, 자신들의 수확을 미루고 영주의 경작지에서 일을 해야 하는 농민에 대한 보상이었기 때문이다. 음식을 제공하지 않으면, 농민들은 파업을 벌였다.

하루에 먹는 식사의 수는 어떤 식사를 포함시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해리슨은 옛날에는 아침, 점심, 음료 또는 간식, 자기 전 간단한 저녁 식사로 하루에 네 끼를 먹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주장했다. 도덕주의자 로버트 매닝은 노동자를 포함한 성인에게는 하루에 두 끼, 아이들에게는 세 끼를 먹을 것을 권고했다. 해리슨이 관찰한 것처럼, 정오에 가장 많은 양의 식사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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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은 좋은 음식을 즐기며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웃과 친척을 초대해 식사와 에일을 즐겼다는 사실은 앞서 살펴보았다. 하지만 더욱 성대한 잔치도 마을 생활의 일부였다. 교구 길드는 항상 축일을 기념하기 위한 연회를 열었다. 15세기 마을 길드의 회계장부는 이러한 공동 식사가 얼마나 정교했는지를 보여준다:

... 소고기, 껍질을 벗긴 송아지, 다른 송아지 세 마리, 양 반 마리, 양 가슴살, 송아지 가슴살, 새끼양 다섯 마리, 돼지 여섯 마리, 토끼 일곱 마리, 계란, 버터, 우유, 크림, 후추, 식초, 정향, 메이스, 설탕, 대추야자, 꿀.

약 100명이 먹을 연회 음식을 준비할 요리사는 임금으로 16펜스를 받기로 되어있었다. 음식들은 접시에 차려졌고, 은으로 만들어진 소금 통이 이 행사를 위해 자랑스럽게 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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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식과 음주는 일상적이었고, 이러한 행동에 대한 비난은 심지어 검시관 기록에도 나타난다. "5월 17일 자정, 엘스턴의 윌리엄 크리스트마스의 아들인 오스버트 르 웨일은 술에 취하고 혐오스러울 정도로 포식한 상태로 베드퍼드를 떠나 집으로 향했다. 그는 집 앞의 돌에 발이 걸려 넘어져 머리를 부딪혔다. 그의 하인 소년이 다음날 아침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

음주는 또한 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월의 어느 날 밤, 브롬엄의 교구 사제가 교구민들을 방문하던 중 네 명의 남자에게 길이 막혔다. 그들은 사제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난 사람인데, 니들은 뭐야?" 이라는 경솔한 대답에 술취한 남자 한 명이 그의 머리를 도끼로 내려쳤다.

성인들 사이에서 음주는 야간에 술집에서뿐만 아니라 일하는 도중에도 흔한 일이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서른 살의 존 바론은 말을 타고 선술집에 갔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서른 두 살의 또 다른 남자는 시장 광장의 우물 근처 벤치에 술에 취한 채 앉아 있다가 우물에 빠져 익사했다. 한 남자는 술에 취한 채 낚시를 하다가 물에 빠졌고, 또 다른 남자는 연못에서 볼일을 보려다가 물에 빠졌다. 세 번째 남자는 에일 주전자를 들고 마을 거리를 걸어가다가 개에게 물린 후, 개에게 던질 돌을 집으려다 벽에 머리를 부딪혀 죽었다.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선술집에 갔고 술에 취했다. 한 유명한 캐롤은 낮 동안 선술집에 고기와 생선을 가지고 간 여성들에 대해 노래했다. 그들은 집에 돌아와서는 남편에게 교회에 갔었다고 말하지만 곧바로 잠이 든다.

여성은 남성보다 술과 관련된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다소 높았다. 여성이 당한 사고의 2%가 구체적으로 술과 관련된 것으로 묘사된 반면, 남성의 경우는 1%에 불과했다. 여성이 술에 취할 가능성이 더 높았는지, 아니면 그러한 행동이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한 사실로 기록에 남게 되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술이 기록된 것보다 사고사에 훨씬 더 큰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수확기에 수레에서 떨어져 죽은 사고들은 대부분 일하는 도중에 마신 에일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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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술집에 가거나, 빵, 치즈, 에일로 구성된 소박한 식사를 나누거나, 길드 연회에 참석한 이 사람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정하는 것처럼 난폭한 농부들이었을까? 생활과 식탁 매너에 있어 예의와 세련미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다소 놀라운 일일 수 있다. 소작농 집안에서 도난당한 물건 목록에는 종종 냅킨, 수건, 식탁보가 포함돼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손으로 음식을 먹었고, 항상 가지고 다녔던 칼을 사용해 치즈, 고기, 빵을 잘랐다. 스푼은 스프와 죽을 먹는 데 사용되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더 나은 가정에서는 은으로 된 스푼을 사용했을 것이지만 나무 스푼도 사용되었다.

상류층의 경우 식사 전에 꼼꼼하게 손을 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너에는 식탁에서 고양이와 개를 쓰다듬지 말고,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거나 식탁보로 손을 닦지 말고, 손톱을 깨끗하게 하여 식탁에 함께한 이웃을 불쾌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길드 규정에도 연회에서 지켜야 하는 예의 바른 행동에 대한 지침이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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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준으로 보면 중세 농민들은 역겨울 정도로 악취가 났겠지만, 이 문제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옳지 않다. 연기가 자욱한 집에서 생활하고, 동물들과 일하며, 고된 노동으로 흘린 땀에서 나는 냄새는 지금은 맡기 힘들겠지만, 농사일과 함께하는 평범한 냄새들이다.

물론 우리도 그 시대 물질적 환경에 대해 궁금하기 때문에 목욕은 의미있는 연구 영역이다. 당연히 잉글랜드 왕들의 경우조차도 이런 사적인 사항에 대한 세세한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다만 존 왕의 경우, 다른 결점이야 어쨌든 다른 왕들보다 뜨거운 목욕에 대한 회계 기록이 많다는 점은 알려져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목욕탕에서 매춘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문학과 삽화 등에서는 목욕을 관능적인 만남의 일부로 묘사하고, 부부의 침실에 목욕통을 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농민들의 목욕에 대해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검시관 기록에는 목욕하다가 비극적으로 익사한 사람들이 35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사례 수보다 그 내용이 더 많은 정보를 줄 것이다.

우선, 대부분은 날씨가 따뜻할 때, 개울이나 연못, 강에서 목욕하다가 일어났다. 예를 들면, 1362년 8월 어느 화요일, 26살의 수확기 노동자가 개울에서 목욕한 후, 몸을 말리려고 춤을 추다가 물에 빠져 익사했다. 더운 날 양을 치던 소년들이 더위를 식히려고 옷을 벗고 목욕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는 식사 전후에 손을 씻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10살 소년이 장터의 노점에 앉아서 식사를 마치고 그릇과 손을 씻으려다 큰 물통에 빠져 죽었다. 또 다른 남자는 저녁 기도 시간에 목욕하러 갔는데 강의 깊이를 알지 못해 빠져 죽었다.

겨울에는 뜨거운 물을 대야나 통에 담아 목욕했다. 1349년 2월에는 어떤 여자가 집에서 아궁이 옆에 물을 끓이며 목욕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옆 요람에 있던 생후 15일된 아기가 있었는데, 물을 끓이던 삼각대가 무너지면서 끓는 물이 아기에게 쏟아졌다.

이런 예시가 보여주듯이 농민들은 목욕을 즐겼고, 더러운 손을 씻거나 고된 노동 후의 땀을 씻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나 자주 목욕했는지는 알 수 없다.

농민들은 스스로 옷을 세탁했고, 구호소나 병원에서는 관리인의 아내가 입원자들의 침구와 옷을 빨아주었다. 세탁과 관련해서는 12건의 기록만 있지만, 어떻게 빨래했는지, 누가 했는지에 대한 정보를 준다. 보통 연못, 우물, 강에서 빨래를 하거나 천을 씻었다. 주로 여성들이 빨래를 했지만 개인 물건은 누구든 씻을 수 있었다. 19살의 한 남자가 금요일에 일을 마치고 양말을 빨다가 연못에 빠져 죽었다. 어떤 경우는 더러운 옷을 삶는 큰 통이 사용되기도 했다.




Barbara A. Hanawalt, The Ties That Bound: Peasant Families in Medieval Eng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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