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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그대는 정원준을 아는가?모바일에서 작성

ㅇㅇ(223.33) 2022.03.20 00:23:58
조회 5288 추천 80 댓글 25

이제는 한때 신림동의 아이콘이었던 정원준을 아예 모르는 행시생도 많을 것이다. 2019년 정치학 1순환 수강생 여섯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예비순환에서는 그나마 있던 실강생 일곱명 중 이대생 두 명을 쫓아낸 뒤, 그 길로 곧장 사무실로 걸어가 망치같은 주먹을 흔들며 폐강을 선언한 상남자 그 자체 정원준. 아직 그가 조금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외교원 수험가에서조차, 정원준이 쉬는 시간과 강의 종료 시간 외에는 아무것도 지키지 않는, 그저 ‘아직 퇴출되지 않은 괴팍한 강사’로만 인식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수업의 80%를 잡담, 연설, 노래, 상경계욕, 법대욕, 공대욕, 전국 팔도 모든 지역에 대한 욕, 경상도 욕, 그리고 본인의 군대썰로 채우는 정원준에게도 빛나는 시절이 있었다. 그는 실강생 수백명을 모으며, 절대적인 고시촌의 메이저인 사법시험 수업을 밀어내고 가장 큰 강의실을 차지하였던 메이저 강사였다.
화무십일홍이라 하는데, 꽃이 시든 것은 꽃이 시들었기 때문인가, 열흘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인가? 정원준의 빛나는 시절을 모르는 행시생도 이제 많고, 아는 사람도 그 시절의 정원준의 모습이 어땠는지는 알고 있지 못 한다. '수업을 열심히 하는 정원준'이 어떤 강사인지 아는 사람은 이제 없다. 당신은 아는가, 정원준을?

1장 <안암동 촌놈, 신림동 입성>

한국에서 '공부'란 곧 시험공부를 의미하고, 한국에서 공부하면 떠오르는 동네는 신림동이다. 신림동은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 노하우가 한데 농축된 곳이었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 내용을 공부한다'는 발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이 신림동이었다. 기초 소양과 같은 이야기를 강조하려는 강사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 했고, 일개 연대 규모의 수험생들이 금과옥조처럼 그 말씀을 떠받드는 강사들조차 효율의 지배를 조금이라도 거부하려 하면 버림받는 서슬퍼런 동네. 그런데 이런 신림동에, 비효율적인 공부법이 오히려 가장 좋은 공부법이라는 구호와 함께 정원준이 등장했다.
당시 신림동 정치학 1타는 강제명이었다. 강제명은 행정학과 정치학을 동시에 강의하며, 두 과목의 연계성을 강조하는 강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정치학은 점수마저 짜게 주는 바람에 매우 후순위에 있는 과목이었다. 행정학도 마찬가지였던 만큼, 수험생들은 두 과목을 매우 핵심적인 포인트만 암기하고 들어가서 면과락, 내지는 50점 이상만 확보해야하는 방어적인 과목으로 취급했다. 강제명은 이러한 수험생들의 필요에 완벽하게 부응하였다. 정치학 이론들을 암기 가능한 단위로 조각조각 쪼개 놓은 다음, 마인드맵처럼 이거는 이거랑 연결되고, 저거는 이거랑 연결되고, 어떻게 연결되는지만 간략하게 설명 해 주는 것이 강의의 전부였다. 그리고 행정학 역시,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매우 유사한 구조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여 마인드맵을 만들어줌으로써, 정치학과 행정학의 유사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나름대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였다. 수험생들은 사실상 정치학/행정학이라는 하나의 과목을 두 회차에 걸쳐 수강하며, 충실히 암기한 핵심 용어와 문구들을 확실하게 시험장에 들고 간 다음, 충실하게 시험지에 바르고 나왔다. 이 전략은 지금도 아주 유효한 방어적인 전략이고, 현재 베리타스에서 교주처럼 군림하는 금동흠 원장은 '정치학과 행정학은 한 과목이다'라는 말을 설파한다. 이는 금동흠 원장이 사법시험 메이저 강사였던 시절의 수험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법시험 시절과 현재의 신림동은 모든 것이 다르지만, 마치 금동흠 원장이 아직도 신림동을 지배하듯, 신림동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최소한 그때 완성된 정신세계의 핵은 아직도 신림동과 신림동식 공부의 핵이다. 강제명이 제시한 학습법은 어찌보면 강제명이 고안한 것이 아니다. 신림동의 순리이자, 자연법칙과도 같은 필연적 귀결이었다. 시험에 붙기 위해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어찌 있을 수 있는가? 강제명이 군림하는 동안 수많은 정치학 강사들이 우리에게 이름을 불려보지도 못 하고 등장했다 사라졌다. 신림동에서 강의를 하는 한, 그들은 강제명식 수업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하지 않는다면 퇴출되었다. 그리고 강제명식 수업을 하였기 때문에, 신림동은 그들을 강제명의 아류로 규정하였고, 퇴출시켰다. 강제명이 영원히 1타로 군림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느 날, "행정학 같은 씨발스런 하등 학문과 정치학을 엮지 말라"는 고함을 치며 정원준은 등장했다.

2장 <신림동의 나폴레옹, 툴롱에서 승전>

'행정학 같은 씨발스런 학문과 정치학을 비교하지 말라'는 일갈과 함께 혜성처럼 등장한 정원준은 그야말로 신성이었다. 정원준의 승리 중 가장 결정적인 승리는 후술할 강제명과의 전투였으나, 정원준의 첫 승은 강제명보다 더욱 강력한 상대일 수 밖에 없는, '고시생'과의 전투였다.
지금 몰락한 정원준을 보면 어떠한 생각이 드는가? 정원준에게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극소수의 수험생들은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는 좌파 성향 수험생들이 많아서 그 연설들을 들어준 것이고, 지금은 수험생들의 성향이 바뀌었기 때문에 수강생이 줄어들었다.” 이 말은 반만 알고 하는 말이다. 저 말은 '정원준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제대로 숙고하기도 전에, 현재 유행하는 일련의 세대갈등론적 맥락속 정원준의 위치인 '고려대학교 출신 586'에 지나치게 집중해서 나온 성급한 결론이다. 진짜 결론은 정원준이 누구를, 왜 깠는지를 살펴보아야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정원준은 무언가를 까고 싶어지면, 그 대상이 교실에 있는지를 먼저 확인했다. 그리고 자기가 까고 싶은 것에 해당되는 학생이 있는 경우에만 욕을 했다. 지금은 소문도 소문대로 났고, 수강생이 너무 적어서 걸려들 확률이 너무 낮으니, 없어도 일단 까는 것 같다. 어쨌든 정원준은, 외고를 까고 싶어지면 '여기 외고 출신 있나?'를 먼저 물어봤다. 누군가가 손을 들면, 쇠꼬챙이같은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며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적당히 깐 것 같으면 그 학생의 대학을 물었고, 그때 정답은 '고려대' 밖에 없었다. 정답을 말한 경우에도 '너 같은 외고 샌님 꼴통을 입학시켜서 고려대학교가 이 꼴이 되었다'는 일갈이 날아갔다. 추가 질문에 대한 대답을 '경영학과’로 한 학생은 환불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상태로 몰렸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정원준이 신림동에 입성했을 당시 외고의 위세는 어마어마했다. 고려대 노어과 88학번인 정원준은 외환위기가 터지고 몇년 지나지 않았을 때 신림동에 입성했다. 당시 신림동에 있던 외고 출신 학생들은 서울대학교가 비교내신제를 폐지하기 전 외고에 입학한 학생들이었다.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듯 했고, 자기가 서울대 학생이라는 사실보다, 대원외고 출신임을 더 자랑스러워 하는 학생들이 적지않게 있었다. 정원준이 여기 외고 출신이 있는지를 물었을때 손을 들었던 수많은 외고 출신들은 출신을 자랑할 기회가 내심 반가웠을 수도 있다. 그 얄팍한 기대감은 예외없이 짓밟혔다.
반항한 수험생이 없었을 것 같은가? 수업 도중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사람, 고함을 치며 덤비는 덩치 좋은 사람,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정원준은 너무나도 강했다. 주먹을 쓸 필요도 없었다. 기세에 눌리지 않더라도 그 전달력과 언변을 당해낼 수 없었다. 토론을 하자고 도전장을 내미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후술할 정원준의 인문학적 소양은 그 누구도 꺾지 못 했다.
대학생의 마인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공부를 잘 한 것에 대한 보상이 응당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개성을 학벌이나 집안의 재력 등에서 찾는 수험생이 대부분이고, 대부분이었다. 정원준은 이 점을 여지없이 박살냈다. 우리 대학생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의 정체성,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이치,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하찮은 가치관은 뿌리부터 모조리 썩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지시키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환불을 하거나, 자료만 받고 수업은 듣지 않고 나갔다. 심지어 충격에 눈물을 흘리는 수험생도 있었다. 정원준 욕이 신림동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놀랍지 않은가? 정원준은 신림동 커리어를 이렇게 시작했다. 한때 신림동을 호령한 정치학 1타 강사까지 가는 길의 출발점은 자신의 고객이자 밥줄인 수강생들과의 극한의 대립이었다. 그런데 정원준이 수업을 하면 할 수록 수강생 수는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불호 뿐이었던 정원준이 호불호가 갈리는 강사가 되기 시작했다. (자기 몰래 정원준 수업을 등록했다가 들킨 여자친구와 언쟁을 하다가 차이를 극복하지 못 하고 이별하게 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정원준은 이렇게 메이저 강사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타가 되었다. 이 점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정원준이 부상한 이유, 그리고 몰락한 이유, 모두 그의 잡담, 연설, 추상같은 비난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신림동의 이단아, 정석에서 가장 거리가 먼 이 강사가 성공한 방식은 가장 정석적인 방식, 수업이었다. 메마른 밭처럼 철저하게 갈린 수험생들에게 정원준은 단비같은 수업을 갖다 주었다. 당신은 수업을 제대로 하는 정원준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3장. <경제학의 것은 경제학에게, 정치학의 것은 정치학에게>

경제학의 것이 무엇인지는 알기 쉽다. 그러나 정치학의 것은 무엇인가? 갑갑하게도, 정치가 무엇인지 얘기를 해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치란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나, ‘정치는 누가 무엇을, 언제, 갖느냐의 문제’와 같은 말들은 자칫 형이상학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치학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 혹은, 조금 더 범위를 좁혀 ‘신림동 수험생들이 정치학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로 질문을 바꿔본다면 답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나는, 여태껏 신림동 고시학원 강단을 밟았던 모든 강사 중, 한 순간이라도 저 질문에 대한 답이 되어보았던 강사는 정원준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잠시만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고시공부를 하는 20대의 대학생인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서열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 세상이 서열화되어 있는 건지, 우리는 모든 것에서 서열을 보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자기 탐색은 서열구조 속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대체되는데, 이를 위해 우리는 타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객관성이란 내재화 된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고, 어쩌면 허상에 불과할 수 있다는 얘기는 너무 진부해서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 모두가 같은 타인을 내재화 했기에, 그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일 수록 대학 입시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좋은 대학, 좋은 전공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재화 된 타인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다. 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독립되고 가장 순수한 나의 존재, 그리고 그 목소리를 우리는 알고 있다. 간혹, 정말 간혹, 내재화 된 타인 대신 순수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전공을 선택한 사람에 대한 신화적인 이야기를 접할 때가 있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보통 다음과 같다. 주인공은 객관적으로 좋지만 칙칙한 전공을 거부하고, 취업은 안 되지만 너무나도 멋지고 매력적인 전공을 선택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전공과 완벽한 합일을 이루며 참된 대학생에게 허락된 에너지를 양껏 발산한다. 이런 이야기는 정치학을 대상으로도 존재하고, 우리 대학생 모두 그 이야기를 어느 정도 공유한다. 그리고 유치하게 여기면서도 그 이야기를 동경한다. 정원준이 신림동 강의에서 보여준 정치학은 우리가 신화에서 본 정치학의 매력적인 모습을 온전하게 품고 있었다.
우리가 논문과목을 공부할 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소리는 ‘자기 생각을 정치학/행정학답게 사안의 논의에 녹여내라’는 말이다. 사실 그게 뭔소리인지 아는 사람은 지금도 많지 않은데, 정원준이 데뷔할 당시 신림동에는 그걸 보여줄 수 있는 강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여건에서 수험생들은 결국 면과락 할 수 있도록 답안지에 바르고 나올 내용을 암기하기 바빴다.
정원준은 이러한 수험생들의 행태를 통렬하게 비판했고, 그에게 박살이 난 수험생들은 정원준이 제시할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인지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는데, 그는 학생들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합하였다. 정말 기초적인 단계까지 내려가서 정치학 다운 생각이 무엇인지, 폐기물이 아닌, 진정 의견이라 할 만한 의견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그게 정치학적 함의를 갖는지를 수업 시간 내내 보여주었다.
정원준이 커리큘럼을 정해놓고 철저히 그것을 따랐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그랬다면 그의 급부상도, 몰락도 없었을 것이다. 정원준은 수업 노트를 전혀 준비해 오지 않았다. 어제 입고 온 옷을 그대로 입고 온 상태에서 털레털레 강의실에 들어왔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수험생들을 훑어보다가, 20분 가량을 잡담을 하였다. 적당히 했다 싶으면, 아무 표시도 되어 있지 않은 책을 대충 펴서 웅얼웅얼 읽었다. 이 부분 중요합니다, 여기 밑줄치세요, 한두마디씩 하는, 전형적인 신림동 강의 중에서도 최악의 강의를 했다.
그러다가 무언가 꽂히는 순간, ‘여기 보라고…’하며 운을 떼는 순간 정원준의 모든 장점이 찬란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깊고 넓은 인문사회과학적 소양과, 그 소양을 기초로 하여 여러 사건들과 개념들을 하나로 포섭하는 능력, 그렇게 구성한 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놀라울 정도로 탁월하게 전달하는 천재적인 웅변술이 여과없이 드러났다.
잡지식이라는 말은 있지만, 잡지식과 대비되는 ‘참지식’이라는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잡지식들은 하나의 구조로 엮이는 순간 더 이상 잡스럽지 않다. 정원준은 책에 나와있는 각종 이론들을, 정말 풍부한 역사적 사례들은 물론, 위키피디아 구석탱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식과 접목시켜 충만한 설명을 구성했다. 역사적 사례로는 전쟁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항상, 예외없이 삼천포 너머까지 떠내려갔지만, 그것은 잡담이 아니었다. 정원준의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 현대 사회에 대해 정원준이 열변을 토해놓기 시작하면,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정치학’을 접하면 응당 발견해야 한다 생각하는 정치학의 매력이 여과없이 드러났다. 각종 현안들을 자신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다음, 각종 지식을 동원함하여서 비판한 뒤, 엄밀하게 정립된 이론적 논리 체계를 적용하여서 매서운 평론을 내놓았다. 정원준의 시각, 그의 관점은 잡지식을 ‘참지식’으로, 잡담을 평론으로, 평론을 수업으로 만드는 힘이 있었다. 수험생들은 드디어 내가 생각하는 정치학을 만났다는 기쁨을 느꼈다.
신림동 그 어떤 강사도 정원준과 체급이 맞지 않았다. 박사나 교수 출신은 전달력이 부족했고, 수험생 출신은 소양과 절대적인 지식이 부족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모두 정원준 보다 재미가 없었다.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만 수업 내내 하는 사람보다 어떻게 더 재미있을 수 있겠는가?
비단 강제명 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학 강사들이 수업 중 내놓는 자신들의 인사이트는 정원준의 평론보다 둔탁했다. 그리고 설득력, 아니 설득당하고 싶게 만드는 능력이 한참 모자랐다. 재미가 없었다. 강사들은 빠르게 수강생을 잃어갔고, 정원준은 점점 성장하며, 401호를 꽉 채우는 강사가 되었다. 정원준은 그저 자기 수업을 했을 뿐인데, 강제명에게 승리하였다. 철저히 수험가적 관점에서는 이것이 정원준 강사 커리어에서 가장 의미있는 승리였다.
그러나 이런 정원준은 현재 수강생수가 어마어마하게 줄어들었다. 상술하였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몰락의 원인을 어떠한 환경적 변화에서 찾는다. 수험생들이 예전처럼 좌빨이 아니라서 정원준에게 선동당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성마른 분석을 내놓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설령 수험생들의 성향이 변했을지언정, 저 분석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정원준을 밀어내고 한림 정치학 1등, 어쩌면 정원준보다 수험생이 백배 정도 많을 수 있는 강사가, 과거 정원준이 짓밟았던 깔끔한 요약, 정리 중심의 김희철이라는 점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꽃이 활짝 피어 조화를 치웠던 집주인이, 다시 조화를 들여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정점에서 정원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4장 <파죽지세>

정원준의 주무기이자, 정원준의 알파와 오메가였던 그의 강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다. 강의라는 무기는 다른 강사들도 다 가지고 있건만, 정원준의 그것은 대체 어떻길래 그리도 강력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변 역시 지나치게 정석적이고 뻔하다. 정원준은 신림동 강의의 본질을 꿰뚫었고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강의의 본질은 무엇일까? 강의의 본질은 엔터테인먼트고, 이제는 미디어다. 스스로를 수재 쯤은 되는 사람으로 오해했던 나 같은 사람이라면 좋아했을 영화인 <굿 윌 헌팅>을 보면, 짧은 지식으로 같잖게 거들먹거리는 하버드생에게 맷 데이먼이 일침을 날리는 장면이 나온다.
너는 공공 도서관에서 1불 50센트의 연체료만 지불해도 얻을 수 있는 교육을 받기 위해 15만불을 낭비했어. (You wasted $150,000 on an education you coulda got for $1.50 in late fees at the public library.)

사실 따져보면 우리도 그렇다. 우리는 왜 5만원 짜리 책에 나와있는 내용을 숙지하기 위해 60만원짜리 예비순환을 결제하는가? 범위를 줄이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사실 범위는 기출 문제 분석을 통해 알 수 있고, 기출 문제는 무료다. 심지어 우리에게 강의를 하는 강사들의 대부분은 행정학의 박경효 정도를 제외한다면 출제위원이나 채점위원과 거리가 먼, 고시생 출신 내지는 박사 정도다. 그렇다면 강사들이 해주는 것은, 우리가 응당 해야하는 조금 귀찮은 작업을 대신 해주는 정도다. 당신은 강의를 왜 수강하는가?
강의에는 효용이 없고, 강의를 듣는 수강생들은 돈을 낭비하고 있다는 말을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강의에는 가장 분명한 효용이 있고, 수험생들은 단지 밖으로 내뱉지 않을 뿐,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수강료를 지불한다. 그 효용은 ‘재미’다.
물론 강의의 재미는 코미디나 드라마와는 다르다. 우스운 농담이나 재미있는 썰 등등은 강의가 주는 재미의 부차적인 요소밖에 되지 못 한다. 하지만 웃음과 눈물만이 재미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최소한 이 글을 읽고 있을 행시생들은 알고 있다. 몰입만큼 재미있는 것은 없다. 코미디와 드라마 모두 몰입을 기초로 하고 있고, 몰입을 유발하지 못 한다면 소위 말하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컨텐츠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재미있어서 저 강사의 강의를 수강한다는 말을, 부진정이나 하는 말로 여기고 차마 내뱉지 못하지만, 사실 우리는 재미가 없는 내용을 공부하기 싫어하고, 조금 더 정직하게 말하면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강의를 수강한다. 강사들은 재미없는 내용에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그것이 강사의 존재 이유이다. 우리는 재미 없지만 내용을 잘 이해하는 강사의 강의는 절대 수강하지 않는다. 재미 없는 강사에게는 알고 있는 것을 설명 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재미있는 강사는 그 특유의 말투를 곁들이며 설명을 끌고가다, 분필소리와 판서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고, 비유를 들때도 있고, 농담을 할 때도 있고, 건조한 설명으로 돌파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핵심을 전달해 학생들이 쾌감을 느끼게도 한다. 이런 쾌감을 통해 학생들은 강의에 몰입하고, 강의 전에는 재미없어서 쳐다도 보기 싫었던 내용에 몰입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내용에 몰입한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한다. 어찌보면 이것은 기적이다.
내가 딱 하나만 단언할 수 있다면, 신림동에서 이것을 가장 잘 하는 강사는 정원준이었다. 강의가 전방위적일 수록 몰입은 더 수월하다. 오감을 더 많이 자극할 수록 학생들은 강의에 더 깊게 빠져든다. 정원준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서 학생들을 자신의 강의에 몰입시켰다. 수업 시간에 노래를 부르고, 농담을 하는 것과 같은, 아예 무관한 재미는 물론 (여담이지만 정원준은 노래를 매우 잘한다. 의외로 바리톤이 아니라 맑은 테너에 가까운 소리를 가졌는데, 포크나 8-90년대 발라드와 굉장히 잘 어울린다.) 한국정치를 설명하며 박정희,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 이회창,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현대사 주요인물들을 성대모사 하며 불러일으키는 몰입감의 고조는 당연한 수준까지 갔다. 이 모든 요소들은 3장에서 설명한 정원준의 풍부한 정치학적 시각, 바로 그 날카로운 평론과 관점으로 꿰어졌고, 서 말의 구슬은 찬란한 목걸이가 되었다. 이런 강의가 재미 없을 수가 있는가?
물론, 정원준의 수업은 콘서트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딱히 없다. 더 나아가, 정원준이 가르쳐주는 것은 없고, 세 시간 내내 연설만 하고 머릿속에 남는 것은 정원준의 사상 뿐이라는 말도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잠시라도 신림동식 수험관에서 벗어난 해석을 해야 정원준의 당시 파죽지세를 이해할 수 있다. 수강생이 많은 만큼 합격생들도 많았는데, 대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강사”가 어떻게 저리 많은 합격생을 배출했을까? 상술한대로, 재미를 경험한 학생, 몰입을 경험한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하게 된다. 정원준을 불씨를 당겨주었고, 학생들은 불을 크게 지폈다.
하지만 정원준이 저 결과를 예상하고 수업을 진행했다는 것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 얼핏 보면 정원준 칭찬 일색인 이 글의 제목을 <정원준 쇠망사>라고 붙인 것은, 그저 <로마제국 쇠망사>를 따라한 것이 아니다. 애당초, 내가 정원준의 수업을 수강한 이유와 별개로, 내가 정원준에게 깊은 호기심을 갖게 된 이유는, 정원준의 수업 방식, 수업 내용, 수업 결과, 학생들의 감상 등 수많은 요소들 중 정원준이 의식적으로 계산하고, 계획을 세우고, 이행함으로써 발생한 것은 단 하나도, 정말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여태껏 극찬해 마지 않았던 정원준의 대단한 수업은, 무계획적으로, 무작위적으로 흩어져있던 것들이 어쩌다가 맞아떨어진 엄청난 우연이 낳은 기현상에 가깝다. 그리고 우연한 아름다움은 필연적으로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저 대단한 맞물림이 느슨해지면서 정원준과 그의 수업 역시 힘을 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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