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이 사용하던 30년식 대검은 거의 5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대형이었다.

일본군이 철수한지 20년이 지나간 1960년대 중반은 한국에 석탄 생산을 위한 탄광이 전국 각지에서 개발되는 시기였다
그렇다보니 나의 외조부가 살던 지역의 옆동네에도 탄광이 크게 열리며 외지에서 온 광부들과 이들이 뿌리는 돈을 쓸어담기 위한 술집등 불건전한(?) 업소들이 몰려들던 시기였다
사고가 터졌음을 알리는 사이렌소리가 탄광촌의 밤을 찢을때
술집을 운영하던 여주인이 칼에 맞아 죽고 돈 4만원이 사라진 것은 지역 순사들만이 아는 상황이었다

경찰은 등을 떠밀리듯 수사에 착수했으나 과학수사고 나발이고 없던 시절이니만큼 범인이 그날의 수입을 노리고 몹쓸 짓을 저질렀고 피해자가 칼에 맞아 죽었다는 정황 밖에는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해방 직후부터 근무하던 짬밥높은 형사들이 나름 머리통을 굴렸다
일제를 경험해 본 그 사람들은 칼에 찔린 부분이 깊고 자창의(찔린자국) 둘레가 일정한 것을 보고 군용 대검, 그것도 일본군의 대검으로 저질러진 일이라고 나름 생각을 했다
식칼은 점점 너비가 벌어지니 식칼로 찔렀다면 자창 역시 벌어질 것이라는 논리였다
즉 그런 특성을 지닌 일본군 대검을 휘두른 범인은 이것을 접해본적이 있는 일정을 겪어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경찰은 탄광촌 지역과 옆동네인 우리 외가동네까지 수사망을 펼쳐 일정때 징병이나 징용을 나간 적이 있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불러다 조사했다

일제치하 36년이라는 지긋지긋한 기억을 겨우 잊게 되었을 사람들은 알리바이를 대라는 내 나라 경찰 앞에서 다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때 그 순사놈들이나 지금 자신의 앞에서 윽박지르는 그네들이나 다를게 없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들일을 하다 자전거 타고 온 순사에게 끌려 파출소로 불려들어간 나의 외조부를 상대로 어느 전선에서 싸웠느냐 계급이 뭐였느냐 하는 시덥잖은 소리나 주고받던 그네들은
뭐라 잔뜩쓰인 글 한장을 내밀며 여기에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고 들어가라는 말을 꺼냈다

나의 외조부는 글을 몰랐다
자신의 이름이나 겨우 그릴줄 아는 까막눈이었다
그네들은 일본군 오장으로 필리핀에서 싸운 적이 있고 무엇보다도 글을 모르는 나의 외조부가 조용히 이름을 쓰고 탄광촌에서 벌어진 끔찍한 강도살인사건의 희생양이 되어주기를 발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입회하러 온 고참 형사들은 이 상황을 보고 외조부를 상대로 백지를 내밀며 여기에 본인의 이름을 가득 써보라고 했다
글 모르는 외조부가 힘겹게 이름 석자로 종이 하나를 채우자 기가 찬 표정으로 지켜보던 그들은 진술서를 찢어버리고는 그네들을 일본군 식으로 무참히 두들겨 패고 사무실에서 내쫓아 버렸다
글을 몰라 자기 이름도 제대로 못쓰는 사람이 자필 진술서는 청산유수로 쓰겠냐는 것이었다
외조부는 모심다가 끌려왔던 그때와 마찬가지인 어리둥절한 얼굴로 경찰서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5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고
외조부는 아직도 글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