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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연작]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01앱에서 작성

이두나팬클럽회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2.14 23:20:39
조회 1471 추천 71 댓글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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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그녀와 마주한 순간을 표현하자면, 글쎄 형언할 수 없는 경외에 앞선 어렴풋한 기시감이 심장 바깥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 감정으로나 쉽게 설명될 수 없는 조각상을 보며, 몇 마디 언어로도 표현되지 못한 채 마음이 그저 쿵쿵 울리고 있었다. 마음을 그득히 채운 기시감은 이윽고 이 조각상이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님을 확신케 했다.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무엇을 해야 했던 걸까. 바싹 내지른 손끝과 입술을 앙다문 표정에서 차가운 얼음으로도 채 숨길 수 없는 그녀의 의지가 유리벽 너머로 스며 나왔다. 그래서 나는 문득 네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졌다.

'작가 미상'
'제작연도 미상'

그러나 이것은 그녀에게 붙여진 이름의 전부였다.


1

어릴 적부터 나는 가끔 죽는 꿈을 꾼다. 물론 주인공은 나다. 한때는 과연 키가 얼마나 더 크려고 이러나 내심 기대하곤 했지만 불행히도 땅에 떨어져 죽는 꿈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꿈은 같은 레퍼토리로 돌아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운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오늘은 또 어떤 방식으로 괴롭힘을 당할까, 사인을 예측하는 재미라도 있으니. 나부끼는 바람에 휘말려 어떤 건물의 피뢰침에 몸뚱이가 꼬챙이처럼 꿰뚫리는 일은 차라리 평범한 축이었다.

최근 꾸게 된 아주 끔찍한 시나리오는 돌덩이들로 옹기종기 뭉쳐진 무지막지한 거인에게 밟혀 죽는 장면이었다. 불행 중에 다행인지 고통은 느끼지 않는다. 꿈이 주는 특권인 것 같았다. 또 짜부라진 몸에서 빠져나와 스스로를 감상하다 보면 그렇게 괴이하고 웃기지 않을 수 없었다. 바퀴벌레 하나 못 잡던 여린 소녀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보고 헛웃음을 지을 수 있는 건, 확실히 이 망할 꿈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숲의 냄새가 스멀스멀 코끝을 간지럽힌다.

꿈을 꾸고 나면 온 몸에 땀이 흥건해 다시 샤워를 해야만 했다. 빌어먹을 단칸방은 손바닥만 한 창문에 에어컨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인 점은 이런 경우엔 온수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꿈은 자아에 내재된 무의식의 영역이다.'

이제는 닳고 닳도록 다녔던 시내 정신과의 의사가 건넨 말이다. 그 돌팔이가 지어낸 건 아니고, 프로이트라는 학자가 처음으로 한 말이라고 했다. 거인을 만나본 적도, 심지어 숲도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그 무의식이 내 현실의 뗄 수 없는 일부가 되어 생활을 잠식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 순간에 이르러 꿈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적확히 말하자면, 그때부터였다. 

2

"지금 보시는 이 조각상은 노르웨이 해상 100km 바깥에 위치한 빙하 안에서 발견된 조각상으로, 표정 묘사의 정교함과 역동성 있는 표현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사실 그보다 더 현실적인 원인은 과도하다시피 내 쪽으로 쏠린 업무였다. 얼마 전 발굴된 '녹지 않는 얼음 조각상'을 보러 하루에 100명도 채 오지 않았던 박물관에 전 세계 곳곳에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관람객들의 전시 해설을 전담하느라, 몸이 단 하나뿐임을 한탄해야만 했다. 현대 과학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인 이 조각상의 정체보다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그만큼의 가치를 보유한 전시가 우리 박물관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교에서 가장 똑똑한 과학자들이 있는 연구실에서 조각조각 해체당하고 있어야 정상인 것임에도, 이렇게 떡하니 제1 전시실 중앙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내 워라밸을 망치고 있다는 것에 영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르웨이 언론과 시민단체, 과학자들은 이미 이 얼음 조각상을 7대 불가사의에 추가해야 한다고 연일 아우성이었다.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렇기에 납득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더 우습기 짝이 없었다.

"안나."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양손에 커피를 들고 박물관장 헬렌이 다가왔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었다. 

"수고했어요. 어려운 부탁 해서 미안해요."

헬렌은 나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 감았다. 나는 머쓱한 미소로 화답했다.
  
"아니에요, 헬렌. 이 정도는 예상했는걸요, 뭐. 세상에, 하루에 한 타임 맡을 까 말까 하던 제가 세 타임이나 전담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죠. 사흘 전까지는 말이에요."
"내가 그래서 안나 씨를 좋아해. 전 퇴근할게요! 마무리도 부탁하고."

헬렌은 쿡쿡 웃으며 내 어깨를 몇 번 토닥이더니 다시 제 갈길을 갔다. 멀어져 가는 박물관장을 바라보며 참았던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오늘도 겨우 하루를 넘겼다.



4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일일 보고서를 끝까지 쓸 수 있었다. 헬렌의 성격 상, 다음날 아침 자신의 책상에 서류 세 장과 결재 파일 중 한 가지라도 빠져있는 걸 발견한다면 그날 하루는 신경질적으로 변할 게 뻔했다. 내가 입사 일주일 만에 터득한 생존방법이었다. 으윽-하는 소리를 내며 팔을 길게 뻗어 기지개를 켰다. 뼈마디 하나하나가 으득이며 누적된 오늘의 피로를 잘게 부숴냈다. 책상 위 차곡차곡 쌓인 에너지 드링크병들을 모두 집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후에야 10시간 후 다시 돌아올 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무실을 나온 후, 정문을 향하는 제1 전시실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혹여 나타날 수상한 사람을 쫓아내기 위해 전시실을 순찰하고 있어야 할 경비는 휴게실에 들어갔는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전시실은 또각거리는 내 구두 굽소리만 낮게 울렸다. 그러다 문득 굽소리를 멎게 한 건 눈 앞에 나타난 모두 꺼진 조명 아래 희미하게 점멸하는 푸른빛이었다. 중앙에 어루 박혀, 오늘도 수천 명의 사람들의 시선을 제 한 몸에 받아낸 얼음 조각상. 칠흑처럼 어두운 전시실 안에서 그녀는 스스로 광원이 되어 제 존재감을 여실히 과시하고 있었다. 과연 불가사의라고 칭할 만한 것이었다. 퇴근의 설렘으로 빨라지던 발걸음이 그녀 앞에서 한참을 뿌리내리던 그때였다.

"저기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경비인가 싶었는데, 전시실의 경비는 모두 남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방금 목소리는 분명히 여자였다.

"여기에요."

암흑 속에서 뚜렷한 형체도, 실루엣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떨리는 목소리만이 낮게 공명했다. 식은땀이 어느새 목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마침내 내가 귀신을 보는구나. 발을 움직여야 하는데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신 앞."

그제야 목소리의 위치를 향해 고개를 바로 돌렸다.  내 앞엔 , 그저 푸른빛의  조각상뿐이었다.

"나 여기 있어요."

그래, 이젠 내가 정말로 미친 게 틀림없다. 어디로 가게 될 지도 모른 채, 나는 미친듯이 내달렸다. 그저 이 미친 새벽이 끝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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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그림을 그려주신 삽화작가님 감사합니다!

오래 준비했습니다. 매주 금요일 연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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